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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당과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시대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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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당과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시대를 이루다.

 

경덕왕(景德王, ? ~ 765년, 재위: 742년 ~ 765년)은 신라제35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동복 동생이며, 아버지는 제 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왕비는 서불감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満月夫人, 경수왕후(景垂王后)). 효성왕에게 아들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의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생애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742년 10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753년 8월에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경덕왕 때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한 때로 제반 제도·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는 한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대개는 한자식으로 개혁하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굴불사(堀佛寺)를 비롯하여 영흥(永興)·원연(元延)·불국(佛國) 등의 절을 세웠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2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경덕왕 10년(751년)에는 불국사가 완공되었으며, 757년 3월에는 녹읍이 다시 지급되었다. 그리고 국학을 태학이라 고쳤다. 또한 집사부의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

 

경덕왕릉

경주 경덕왕릉(慶州 景德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통일신라경덕왕의 무덤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능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년~765년, 김헌영)을 모신 곳이다. 구릉 경사면의 흙을 편평하게 깍아 축조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삼국사기 경덕왕조에 "모지사 서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며, 삼국유사 왕력에 "처음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뒤에 양장골 가운데에 이장했다"고 전한다.

경덕왕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가의 제반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완비하였다. 굴불사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대종성덕대왕 신종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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