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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사 갑사,제승방략, 진관체제, 장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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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사 갑사, 제승방략, 진관체제, 장용영

 

갑사(甲士)는 조선시대에 존재한 직업 군인 제도를 말한다. 간단한 시험을 거쳐 선발하였으며, 근무 기간에 따라 품계녹봉을 받았다.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되었으며 5위의 중심 병력을 이루는 직업적인 군인으로서 무예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정예 부대였다. 갑사는 원래 서울에 올라와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기간 병력이었으나, 뒤에 평안도·함경도에서 변경의 수비를 담당하는 양계갑사(兩界甲士), 호랑이를 잡기 위한 착호갑사(捉虎甲士)가 생겨났다.

투구, 갑옷에 각종 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었다. 《경국대전》 반포 무렵인 성종 때 정원은 14,800명 정도였다. 서울에 주둔한 경갑사(京甲士), 국경지대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주둔한 양계갑사(兩界甲士), 말을 타는 기갑사(騎甲士), 식인 호랑이 퇴치를 위한 착호갑사가 있었다. 갑사 채용은 취재(取材)라 했으며, 취재는 장교를 뽑기 위한 무과와 달리 무예만 보았지 병법 등은 보지 않았다. 경갑사 복무를 마치고 임관하면 거관법에 따라 종4품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권신으로 유명한 유자광도 이런 갑사 출신이었다. 갑사는 본래 지배계층 자제들 중에서 주로 뽑았고, 말이나 군장을 직접 준비해야 하는 등 애초에 본인 부담이 컸다. 그러나 지배층의 군역기피와 문반 선호로 인해 갑사 정원을 채우기는 어려워졌고,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민들의 입대도 허용하다 보니 질의 저하로 이어졌다. 갑사는 부실화된 상태로 임진왜란을 맞았고, 임진왜란 이후 오위제가 속오법으로 전환되는 와중 17세기가 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잡색군(雜色軍)은 조선 초기군사 조직으로 오늘날의 예비군에 해당한다.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소속되었다.

조선의 방어 체계는 주로 국경 지대나 해안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방비가 소홀한 내륙 지방의 방어를 맡기 위해 창설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원종이 재위하던 1268년 이후 잡색군에 관한 몇가지 기록이 존재하지만,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체계적인 편성이 이루어졌다. 1410년(태종 10년)에 기존의 연호군(烟戶軍)의 제도와 편제를 정비한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인 병종(兵種)이라 할 수 없었다. 이어 세종 초기에 향리(鄕吏), 관노(官奴), 향교의 생도 등 군역을 지지 않는 장정을 대상으로 하나의 병종으로 편제하여 1425년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잡색군이 독립된 병종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세종 말부터는 정규 군사가 늘어나면서 잡색군은 전란이 일어나도 동원조차 되지 않는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속오군(束伍軍)은 조선시대군대이다.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 때 역(役)을 지지 않은 양인천민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되었다.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조선의 분군법(分軍法) 군사정책으로 진관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고안되었다. 적의 침입에 맞서 각 지역의 군사를 요충지에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가 이를 통솔토록 하는 방법으로 1만 이상의 대규모 전에는 효과를 발휘하였으나 그 본진이 무너지면 그 후방은 모두 적에게 노출되는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원인이 되어 이후 폐지되었다.

 

진관 체제(鎭管體制)는 15세기 세조 이후 실시되었던,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이다. 각 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주진과 그 아래에 거진, 제진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지방관이 지휘하는 체제로 소규모 적의 침략과 내륙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지만 대규모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립제, 방군수포제 등, 군역이 문란해짐에 따라 병력자원이 줄어 전투력 유지가 어렵다.

 

장어영(壯禦營)은 1881년 성립된 조선의 군영으로, 무위영과 함께 2영을 이루었다. 장어영과 무위영은 기존의 오군영을 통폐합한 것으로, 통리기무아문은 기존의 군영들을 통합함으로써 군 통수권의 분산을 피하고자 하였다. 장어영은 총융청, 어영청, 금위영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군제 개편 이후 옛 오군영 출신 구식군인들과 신설된 신식군대인 별기군 사이의 차별 대우 문제가 생겼고, 이는 당시 일본으로의 무제한 양곡 유출에 의한 쌀값 폭등 등 개화정책의 여러 문제와 겹쳐 불안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옛 오군영 출신 병사들에게는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이어진다. 임오군란 중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장어영은 무위영과 함께 반년 만에 폐지된다.[1]

 

장용영(壯勇營)은 1785년 조선 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이다. 대장의 칭호는 장용사(壯勇使)이다.

초기에는 장용위(壯勇衛)였으나 1788년 장용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00여명의 군사를 5대(隊)로 나눠 만들었다. 1793년에는 한양의 내영(內營)과 수원 화성의 외영(外營)으로 나눴다. 다른 군영보다 규모가 컸다. 1795년 다른 군영의 병사들을 편입하여 5사(司) 23초(哨)의 큰 규모로 군대를 편제하였다.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에 의해 1802년 폐지되었다.

 

별기군(別技軍)은 1881년 (고종 18년)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서 5월 옛 오군영(五軍營)으로부터 몸이 튼튼한 80명의 지원자를 뽑아 무위영에 소속시켜 창설한 신식군대이다. 통리기무아문의 개화 정책에 따라 편성되었다. 훈련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맡았다. 신식무기를 사용하여 훈련하였으며,창설 후 이들은 훈련도감 중 최대 규모의 병영이었던 하도감(下都監)을 훈련장으로 사용한다.

별기군은 기존 구식군대에 비해 급료나 피복 등 모든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왜별기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며 이후 이러한 차별은 구식 군인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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