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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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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다.

 

헌종(憲宗, 1827년 9월 8일(음력 7월 18일) ~ 1849년 7월 25일(음력 6월 6일))은 조선의 제24대 (재위 : 1834년 ~ 1849년)이며 대한제국추존황제이다. (李), 는 환(烉), 본관전주(全州), 는 문응(文應), 는 원헌(元軒)이다.

 

치세

아버지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찍 요절하여 동궁에 책봉되고 1834년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에게 있었으니, 1841년까지 순원왕후 김씨섭정을 하였고 1841년부터 1849년 훙서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천주교의 발호에 반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였다.

 

출생과 유년기

헌종은 1827년 음력 7월 18일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효명세자(익종)과 세자빈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조씨는 익종이 옥을 아로새긴 나무를 담은 갑(匣)을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였고, 태어난 날에는 한 무리의 이 전상(殿上)에서 날아 오래 돌다가 갔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권돈인(權敦仁)이 지은 행장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섰다 한다. 유아기 때에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였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여러번 봐서 눈에 익혀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자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니, 효명세자가 이를 매우 기특히 여겨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였다.

 

동궁 책봉과 즉위

1830년(순조 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동궁에 책봉되어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순조가 승하하자(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12월 18일(음력 11월 18일))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에게 있었고,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간에 암투가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그랬다면 풍양 조씨들이 철종때 큰 화를 입었어야 할것이다.

 

정치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해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노론이었으나 몰락하여 중인이 된 민진용이원덕 등과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를 막으려고 안동김씨를 군권과 주요판서자리에서 배제하고,김흥근을 유배보냈다.그렇지만 요절하여 효력은 없었다. 특기할 만한일로 수령의 장죄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고,과장의 폐단에 대해서 지적했다.

 

천주교 박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46년)가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뒤(1831년), 헌종 대에 들어서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입국했다.(1836년) 이어서, 조선교구장으로서 파리 외방전교회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주교가 입국(1836년 4월)하였고,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자크 샤스탕이 입국(1836년 말)하였다. 이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김대건·최양업·최방제마카오 신학교에 보내서 공부하도록 하였다.(1836년 12월) 이들 신부들로 인하여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 조씨가 집권하자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다. 성리학적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헌종도 천주교에 대한 배격 논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1839년(헌종 5년),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주교·피에르 모방 신부·자크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기해박해) 기해박해가 있고나서 5년 뒤,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앵베르 주교의 순교로 공석이 된 조선대목구에 새로 임명받은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신부 및 다른 신자들이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입국 후 김대건 신부는 선교를 펼치다가, 비밀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1846년 6월 15일) 새남터에서 처형(9월 16일)되었다.

 

최후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김씨의 세도를 꺾으려 했으며 민생 개선에도 나름대로 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하였고, 여기에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안동김씨 세력으로 인하여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자, 자연히 주색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헌종은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849년 7월 25일 (음력 6월 6일) 오시 (오전 11시~오후 1시) 에 23세를 일기로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현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승하하였고, 더군다나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기 때문에 항렬로 따져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철종(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음력 10월 28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구릉의 유좌(酉坐)인 언덕 효현왕후 묘소 옆 경릉(景陵)에 안장되었다.

 

사후

묘호는 헌종(憲宗)으로, 《헌종실록》에 따르면 널리 듣고 다능함(博聞多能)을 의미한다. 시호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숙왕(莊肅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각각 황제(皇帝)로 추존됨에 따라 그에 대한 추존 여론이 나타나면서 순종에 의해 1908년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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