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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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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다.

 

십자군(十字軍, 라틴어: croisade 크로이사데[*])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종교전쟁들이다. 보통 십자군이라고 하면 성지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가리키지만,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서 주동한 전쟁들 역시 십자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본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다.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우르바노 2세 또는 우르바노 2세의 소환에 응하여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르바노 2세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 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졌다.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계층이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것이 이후 다른 모든 십자군들의 선례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교회의 면벌부를 수여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의 단체 승천하게 될 것을 바라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신이 사해줄 것을 기대한 이들도 있었다. 종교적 동기 외에도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이후 6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들과 그보다 세력이 미미한 여러 군소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1년 최후의 기독교 전초기지가 무너진 뒤 성지 방면으로는 더 이상 십자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발트 지역과 메클렌부르크, 루사티아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3세기 초에는 독일기사단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이용했다.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자 기독교 세계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와 1444년 바르나 전투의 대패로 가톨릭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과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것의 양대 대형 사건은 이 시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의 최종적 중심축을 매듭지었다. 이후로도 구호기사단 같은 조직들이 존속하면서 십자군의 개념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 세계의 관심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대륙으로 옮겨갔다.

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모순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을 저지르곤 했고, 십자군 지도자들은 획득한 영토를 본래 명분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기보다 자기 영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 약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분명히 서양문명사에 유의미한 영향을 남겼다.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베네치아 같은 해상공화국들이 번영했다. 교황의 지도에 따라 라틴 교회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영웅주의, 기사도, 신앙심은 중세 문학과 철학의 촉매가 되었다.

 

원인 및 배경

10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동방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 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더구나 당시 서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1]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밖에 서유럽 각계각층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십자군 원정이 단행되게 된다.

 

군중 십자군 (1096년)

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하러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간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난다.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차 십자군은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그러자 중무장한 십자군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슬람군은 게릴라 작전을 써 십자군을 지치게하고, 십자군은 가까스로 안티오키아에 도착, 수 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이 대도시를 점령한다. 그러나 도중에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이슬람군에 포위된채 성내에서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도와주던 아데마르 주교는 병이 옮아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십여년의 영토 확장 끝에 마침내 여러개의 십자군 국가를 세워가는 데 성공한다. 오랜 전투끝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인원과 장군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십자군 국가가 앞으로 이어질 이슬람국가들의 공격을 막아내는지가 관건이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년~1149년)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에 거주하는 기독교인과 군소의 도시 등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 측에서 영웅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등장하여 에데사 백국을 점령함으로써 열세를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또다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에게 점령, 탈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고, 이에 응한 잉글랜드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존엄왕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이지만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아크레를 탈환한 뒤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면서 귀국하고 만다. 사실은 리처드 1세가 없는 틈에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탈환하고자 한 속셈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리처드의 십자군’이 되고 만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길 것으로 여기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때 리처드는 휴전 조건으로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살라딘은 이미 누구에게도 예루살렘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던 것이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행에 옮겨졌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는 데 필요한 수송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 자금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하였다.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럼에도 베네치아는 헝가리를 공략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새 황제가 되어 라틴 제국을 건국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교황청은 라틴 제국을 승인하고, 그 대신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할 것을 요청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 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둘러싼 내용에 대해서는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십자군 측)과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비잔티움 제국 측)란 두 사람의 뛰어난 역사가들이 기록을 남겨 지금까지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알비 십자군 (1208년)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툴루즈를 중심으로 알비(알비주아파라고도 함)라는 영지주의 교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세속의 일이 사악하며 인간의 영혼만이 선이라고 보았다. 12세기 로마 교황청은 알비파를 이단으로 선언, 1208년 알비파 토벌을 위해 알비십자군을 일으켰다. 결국 알비파는 1350년에 소멸되었다.

 

제5차 십자군 원정 (1218년~1221년)

아크레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군대를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알아채지 못하였다.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여러 번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 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1239년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諸侯)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년~1249년)

알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천 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원정을 하여 이듬해 다미에타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살라딘 2세의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패하고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루이는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바이바르스가 주도하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때 시칠리아 왕인 루이의 동생 샤를도 형을 도와 출병하였으나 루이는 1270년 튀니스에서 사망하였고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아크레에 머물면서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했다.

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어린이 십자군

1212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계시를 받은 소년의 선동에 의해 소년, 소녀 3만 여명이 모여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지중해까지 행진하였다가 일부는 난파 때문에 죽고, 일부는 상인의 농간으로 북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것을 말한다.

 

결과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드 앗딘 장기(통칭 장기)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써 야기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총론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서유럽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 등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과 함께 교황을 지지했던 세력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과 지지 세력들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중세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던 정치적 통합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교황과 지지세력의 영향을 벗어나 지역 중심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프랑코 제국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통합이 약화되자 유럽의 각 나라들은 자국 왕권을 강화하여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국가와 동로마 제국의 후계인 비잔티움제국에서 약탈한 물건들이 발전에 기여했다. 서유럽 중심의 십자군은 기독교내에서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깊은 골을 가져왔고,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 없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극단적인 적대 태도가 서유럽에 남게 되어 지금까지 그 불씨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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