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보기

승정원일기

반응형

승정원 일기 - 국가기록 관리체계의 모범,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승정원 일기>는 국정 전반에 걸친 매일매일의 일기를 날짜 순으로 총 망라해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자세하고도 기본적인 사료가 됩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정책에 참고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일기>에서 전례를 찾았습니다.

 

국왕의 비서실 승정원

 

조선 태조 원년(1392) 7월에 반포된 관제에 의하면 원래 왕명출납의 일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중추원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는데 이때 그 속아문으로 승지방을

설치하였습니다.

 

승지방은 왕명출납의 실무를 맡았고 그 장관으로 도승지를 두어 정3품으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때의 관제에 의하면 중추원은 왕명출납 이외에 군기도 관장하는 강력한 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자 사병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정종 2년(1400) 4월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 분할 하였습니다.

 

군기의 사무는 의흥삼군부로 이관하고 왕명출납을 위하여 승지방을 승정원으로 독립시켰으며

태종 원년(1401) 의흥삼군부가 승추부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의 기능도 여기에 귀속되었고

그 명칭도 대언사로 바뀌었습니다.

 

태종5년(1405)에 육조 강화책의 하나로 승추부가 병조에 흡수되면서 대언사는 승정원으로 다시

개편되어 독립된 기구로 부활하였습니다.

그 뒤 고종31년(1894) 갑오경장 이후 승선원으로 개칭될 때까지 승정원이라는 이름의 기관으로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 3월부터 1894년(고종31)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체계적인 기록물,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국사(國史)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입니다.

 

 


 

 

 

 

 

승정원일기의 사료적 가치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

(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입니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됩니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짜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 일기」는 60갑자와 수시력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2년(1851)부터

 순종융희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영인본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으로 일부 제공하고있습니다.

 

 


 

 

 

 

 

승정원의 핵심 구성 인물 

 

승지

 

『경국대전』에 따르면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각 1인씩 모두 6인의 승지가 있었습니다.

승정원의 핵심적인 구성 인원인 6승지는 동벽 및 서벽으로 나누었는데

도승지와 좌승지·우승지는 동벽, 좌부승지, 우부승지와 동부승지는 서벽이라 하였습니다.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지만 종2품으로서 승지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승지들은 자기 고유 업부 외에도 타관을 겸직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주서

 

주서는 매일 국왕이 정사를 보는 앞에서 사관과 함께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을 기록하여 메모한 초책을 하루치씩 하번주서에게 정서하게 하고 상소나

서계와 같은 문자로 된 문건은 서리에게 베끼게 했습니다. 이 두가지를 합쳐서 그날의

일기가 만들어지고 한달 또는 반달치 씩 묶어 표지에 연월일을 적어 승지에게 제출하여

승정원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분량이 많을 경우에는 두 책으로 나누었으며 윤달의 일기는

따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변가주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 관련 기사를 전담해 기록하기 위해 사변가주서

1인을 더 두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상설화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사관 두 사람이 함께 입시하여 사초를 작성하고 주서와

사변가주서가 상.하번으로 나누어 입시해 작성했습니다.

관료들은 아뢸 말을 승지에게 전하면 주서가 글로 써서 아뢰게 되었습니다.

"어느 승지가 어느 관원의 말로서 임금에게 아뢴다"

이를 초기 또는 초책이라 하였습니다.

 

다양한 내용의 승정원일기

 

승정원 일기에서는 기상 정보 뿐만아니라 임금의 행차나 나들이 기록, 건강관리,노인의 복지정책

권당과 학생운동, 조선시대 언로 및 승소내용, 왕의 하루 일정, 조선시대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올린 직언에 대한 판정, 인사를 논하는 왕과 신하의 대화 등 조선시대 주요 정치, 경제 부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출처 : 문화재청

 

포스트가 유익하셨다면 블로그로 세상 열어가기를 구독하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