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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수원화성의 역사와 특징, 거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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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화성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술과 신기재를 사용해 축조하였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매우 뛰어난 동양 성곽 중의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케 된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극심했던 당쟁을 해결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가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할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 건설을 꿈꾸며 축조한 성이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八達門)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을 포함한 4대문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奉壽堂), 두 번이나 방화로 소실되었다 복원된 서장대(西將臺),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등이 눈에 띈다.

그 외에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독특한 시설물인 공심돈(空心墩),

군사적 목적의 이름으로는 동북각루이지만 마치 여염집 후원의 정자 같이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샛문인 암문 등도 매우 독특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수원 화성의 역사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였다.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살려달라고 아우성칠 때

아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영조는 끝내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때가 정조가 열한 살이었다. 임금이 되자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길 계획을 세웠다.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은 양주 배봉산에 있었는데,

마침 뱀이 들끓고 잔디가 말라 죽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정조는 1789년 7월 말,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에 있는 산인 화산(花山)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러자면 원래 화산 근처에 살고 있던 마을인 수원읍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으므로,

읍내에 있던 관청과 주민들을 현재의 수원인 팔달산 쪽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또 다른 이유

 

정조가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하려한 또 다른 이유는

강력한 왕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사실 사도세자가 왕이 되기도 전

당쟁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하들의 세력 다툼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정조는 왕에게는 충성하는 군대와

왕을 따르는 똑똑한 신하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왕권을 강화해야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백성이 모두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던 정조는

모두가 잘 사는 풍요로운 도시를 꿈꾸며 화성을 건설했다

 

1997년 수원화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화성 성곽이 1997년 12월 4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화성은 근대적인 성벽으로 방어 기능이 뛰어나고

모든 시설의 모양과 디자인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는보기 드문 성곽이다

 

수원화성의 특징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은 조선은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을 쌓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곽이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은 산성이다.

그래서 외적이 침입해 오면 사람들은 살던 마을을 떠나 산 위의 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수원 화성은 관청과 관리가 사는 집 뿐만아니라

백성이 사는 마을 전체을 방어하는 성곽이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과 예술을 총망라하는 종합적인 계획 도시의 일환으로

실학사상을 기본으로 한 과학적 건축물이다.

 

 


 

 

거중기

 

지식인들 참여

 

1790년 정조는 실학자 정약용에게 성곽 건설 계획을 세우라 명한다.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받들어 1792년 겨울 수원화성의 축조 계획을 정조에게 올린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수원화성은 축조되었다.

화성은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했다.

 따라서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체재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화성의 축조 방식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와 활차(滑車 :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한 것), 유형거, 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유형거의 특징

 

정약용이 밝힌 유형거의 제작법과 사용법에 따르면,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바퀴가 재래식 수레바퀴보다 작고,

바퀴살 대신 서로 엇갈리는 버팀대를 대 바퀴가 튼튼하다.

바퀴와 짐대 사이에 반원 모양의 부품인 복토를 덧대 수레 바닥의 높이가 높고,

수레가 앞뒤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특히 저울의 원리를 이용한 복토는 수레의 무게 중심을 평형으로 유지시켜

수레가 비탈길에서도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수원화성 둘러보기 

 

 

 

 


 

 

수원화성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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