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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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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

 

정도전 1342년~ 1398년 10월6일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문신(文臣), 무신(武臣), 유학자이자 시인이며,외교관, 정치가, 유교사상가, 유학교육자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을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한양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정벌(1388)과 제2차 요동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93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사형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우씨 부인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명확하지 않아 1342년 설과 1337년 설이 혼재하고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영천우씨(榮川 禹氏)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여식이다. 정도전이 지은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과 봉화정씨 족보에 그의 외가를 영천우씨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스승 이색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것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과 성균박사로 이색과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지이자 정적인 포은 정몽주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민의 불교에 귀의 등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관료생활과 정치 활동

과거급제와 관료생활 초기 공민왕 때인 1360년 (공민왕9년)성균시에 급제한데 이어 2년 뒤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1370년 성균관을 중건하고 그해 스승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그는 스승 이색과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또한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새로운 인재를 찾으려던 시중 신돈에 의해 신진 사류가 중용되면서 그 역시 요직에 앉았던 연유로 신돈의 일파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신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도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세족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을 가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고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이인임 등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그는 부와 권력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였다.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지목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경부흥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때문에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유배와 학문 연구 유배살이 중 그는 온갖 인신비방에 시달렸다.

그가 낙마하자 사방에서 그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비방은 소인배들의 짓이라며 씁슬하게 넘겼다.그러나 그를 원망하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당신은 평소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커녕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아내의 편지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형제들보다 정이 더 깊었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는 그들이 원래 세로써 맺어졌지 은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기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 것으로 나는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는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 정도전의 편지

 

정도전은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아내에게 대의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면 하늘이 돌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친구들에 대한 애증은 이미 정리된 감정이었다. 배소에 있는 그에게 꾸준히 안부를 묻고 편지서신을 보내며 위로하는 친구는 정몽주 등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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