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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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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

 

조선의 건국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 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및 성안 52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7월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맨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받아왔다. 12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췅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제도의 바탕을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한양 천도

1392년 8월부터 그는 새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고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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