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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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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이익의 사상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통에 뿌리를 두며 허목, 윤휴, 윤선도이잠 등의 사상을 계승, 집대성하여 남인 성리학과 남인 실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에서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근기 남인이 정조 사후 천주교 문제로 몰락하게 되면서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경세관

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 (현 안산시 일동)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사농합일(士農合-)을 주장했고 아울러 과거제도의 재검토를 제시했다. 중농주의 계열의 실학자로서 이익은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에 국가 및 개인 경제의 목표가 있다고 여겼고, 토지의 고른 분배를 강조하면서 토지 경작을 기본적인 경제 정책으로 삼고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를 바탕으로 한 한전법(限田)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이나 재산 증식 행위를 크나큰 죄악으로 생각했는데, 특히 화폐나 시장을 부정적으로 생각해 아예 화폐 사용을 중지하자는 폐전론(廢錢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그에게 관직에 출사하라는 조정의 여론과 인물난을 겪고 있던 남인붕당의 청이 있었음에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신들이 있으면 지인들을 통해 사절을 만나 청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물건들을 입수하기도 하였다.

  

학문의 교조화에 대한 비판

그는 조선 후기 이후로 학문이 지나치게 교조화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사서육경에 대한 학자들 개인의 학문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며 비판한 것이다. 그는 '경전주해'에 대하여 송시열 이후의 유학자들이 취한 태도에 대해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자유로운 해석을 못하게 막는 것을 지적했고,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도 이를 언급하였다.

 

"경서 읽기는 실로 어렵다. 주자 이후에 주해가 갖추어진 것이 중용과 대학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서 주해가 틀리는 것이 있어도 고금이 모든 유학자들이  이것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다만 옛날 주해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의심하면 망해(妄解)로 하고 다른 서적과 비교하여 고증을 하면 죄과로 돌린다. "이런 버릇이 있으니 우리나라 학문이 뒤떨어짐을 면할 수 없다

 

경전과 경서를 절대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으면 찾아서 지적하고 수정하거나,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 된다고 역설했다.

 

이기론과 철학

그는 허목의 견해를 계승하여 이와 기는 따로 분리될수 없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이는 남인, 북인 학파에서 통상 주장해왔던 이기이원론과는 다소 달랐다. 그는 세계를 대할 때 관념적이거나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이며 경험론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주(宇宙)와 천지(天地)는 어떻게 다르며, 우주와 기()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의 문제에 의문을 가지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물질 존재의 객관적 형식으로써의 전체 우주즉 공간·시간은 무한하다는 과학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양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영향 받은 성호는 이()를 본체로 중요시하는 성리학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상인 기()가 본질인 이()보다 우선하는 현실주의적 가치관에 의한 기()중심적인 이기론(理氣論)전개하였다. 성호는 삶을 중심으로 한 이기(理氣)와의 관계와 경학(經學)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재해석하였. 성호의 인간관은 삶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인간을 중시하여, 기혈적(氣血的) 존재로서의 육체적 인간을 강조하였다. 성호는 실존적 본성을 재발견하고 인간의 마음의 역할과 감정의 근원을 살펴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간의 실천을 위한 사회 개혁 사상을 주장하였다.

는 또 서양과학 중 특히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한편, 실증적 방법론에 의한 경세치용적인 경학 연구로 사회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성호는 우주의 운행질서와 태양·지구·달 등관해 기존의 동양 천문학에서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저서를 통해 소개했으며,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 그는 경전해석에 있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경전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은 허목, 윤휴로부터 내려오던 전으로, 허목과 윤휴가 몰락한 뒤에도 그들의 자유로운 경서 해석론을 계승, 이어나갔다. 경전해석에 있어 기존 학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시도하여, 성리학과 예학을 현실적·체계적으로 정리, 그 대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학자들로 하여금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을 직시케 했다.

 

생명의 위계질서론

그는 살고자 하는 것이 모든 생명의 공통점이라 규정했다. 그러나 생명 사이에도 위계서열이 있다는 논리를 피력하였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식육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동류다. 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과 만물(동물과 식물)은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고 봤는데, 그 동일한 속성이란 생명이다. 다만 그 생명의 위계는 있다. 곧 인간-동물-식물의 위계다. 위계의 논리는 이렇다. 초목은 지각이 없어 혈육을 진 동물과 구별되기에 그것을 취하여 살아갈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날짐승ㆍ길짐승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의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일하다. 어떻게 차마 해칠 수가 있단 말인가? 라며 동물 학대와 사냥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동물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고수하였다.

 

당쟁과 양반 비판

그는 역사학에도 해박하여 역사 서술의 태도에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당쟁의 폐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불필요한 학문으로 지식인들이 대량생산되고, 양반이 실제적인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에, 직관과 산관을 포함하더라도 한정된 직제(職制)에 비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 싸움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양반 계급도 생업(生業)종사할 것과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할 것과 과거 제도의 잡다한 점을 없애고 관리 승진에서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호 이익은 당쟁으로 편이 갈라지는 이유를 이해 타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에 의하면 "무릇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것이니, 이가 고정되어 있고 사람만 많아지면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가지가 많아지는 법이다."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제자 안정복·이가환(李家煥)·이중환·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권철신(權哲身) 등과 남인학자인 채제공 등에 의하여 연구 계승되었고 이는 정약용과 이현일에게로 계승되었다.

 

실증주의 사물론과 탈중화주의

성호는 중국의 청대(淸代) 고증학과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자구(字句)에 대한 교감·문자학과 음운·훈고· 추론 고증의 방법에 의해, 경전을 연구하는 실용주의적 경학(經學)을 추구하였다. 성호는 현실생활을 도외시한 공허한 관념의 유희만을 즐기는 당시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하나의 경전이라도 능통하여 실생활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경학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은 아니며 자주적인 학문 연구, 자주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실제의 사실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 실증적 사유는 천문·지리·역사· 제도 등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학(酉學)성호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는데, 세계관의 확대와 역사 의식의 심화, 전통적 중화관(中華觀)의 탈피해가게 된다.

 

중농주의 정책

그는 모든 사물의 근원은 농업이라 생각했다. 그는 농업을 기본산업으로 하여,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절제를 바탕으로 상업을 억제하고 돈의 유통을 막고,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성호는 고향인 안산(安山)의 농촌에서 일생동안 농민들과 지내면서 농촌사회의 경제적 몰락을 실지로 체험하였다. 그에 따라 그는 양반들에게도 직접 농사를 짓고, 생산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상업(商業)·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으로 비농민(非農民)의 농지 소유가 늘어나는 반면,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이탈되자, 적은 농사를 짓는 농민을 구제하는 토지 제도로 한 가구당 오늘날의 1,500평에 해당하는 50묘 정도의 영업전(永業田)을 한정하여 기본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균전론(均田論)을 제시하였다.

 

민족 주체성

그의 다채로운 학풍은 대표적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잘 나타나 있는 바 이 책에는 <논속사론(論束史論)>이 있어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역사란 용이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사실의 진가(眞假)를 판별하는 인식은 어렵다고 하였다. 특히 과거의 일을 후일에 와서, 더구나 타()지역의 작사자(作史者)가 함부로 서술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에게 억측이나 요량은 금물이며 그것으로 악을 숨겨서도 안 된다고 했다. 성호는 또한 역사에 있어서 실증적인 점을 중시했으며, 문헌 취급에 있어서는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태

도는 단군신화에 대한 비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성호는 과거의 역사 서술이 선악 한 편에만 서 있다고 지적, 권선과 징악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역사적 계기는 역사적 시간성 즉 역사적 현실의 추세 속에서 발견해야 하며,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파악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객관적 추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아(自我)의 자각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주의를 배척하여, 중국이 유일한 천자(天子)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서양의 각국이 각기 군주가 있어 자기 역내(域內)를 통치하고 있으므로, 각 국가의 독립적인 주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허목 이후 나타난 남인학파의 탈중화주의 사상의 연장이기도 했다.

성호는 ( : 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를 천하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일 뿐이다 (東國自東國),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다르다.라고 주장하여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고,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재인식, 새로운 역사적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도 전통적인 화이적 명분론이나 감정적 차원의 대응에서 벗어나, 계 여러나라가 더불어 사는 상호간의 교린 (交隣) 체제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올바른 역사 이해와 서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객관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 두 가지 사서(史書)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서적을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비판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독립시켜, 역사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식방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익은 우리 나라 역사에 계통을 세워 재구성하기 위해 삼한(三韓)에 정통을 두는 삼한정통론을 강조하였다.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자조선을 민족사의 시원으로 간주하고 기자조선신라를 거쳐서 고려, 조선으로 정통이 이어진다는 서인노론계 사상과는 정면 배치되었다. 단군이 처음 우리 나라를 일으켰고, 그 후 기자조선이 계승하여 남쪽으로 옮겨 마한(馬韓)이란 나라를 연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사의 정통은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 의 변천과정 속에 하나의 계통을 찾아내려는 성호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로 역사가 중단된 듯이 여겨졌던 공백기간에, 마한으로 나라가 이어진 계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통으로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정통론은 중국사가와 같이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 파악에 있어 체계성을 위한 것이었고 한 걸음 나아가 중국의 정통사상 [천자사상]을 극복하게 되었다. 성호에서 비롯한 이 정통론은 안정복·정약용으로 계승 심화되었는데,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역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였고, 다산 정약용에 와서는 현실론적 주장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성의 잔재가 일소되었으며, 나아가 현실성에 입각한 역사이해를 가능케 했다.

그의 삼한 정통론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보다 강화하였으며, 그의 후계자이자 수제자인 안정복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간주하였고, 이후 단군조선-기자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관의 모태가 되었다. 그의 이전의 남인, 북인의 학자들은 중화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남으로서 이전의 남인, 북인 학자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두게 된다.

 

인물평

농촌에 은거하면서 이익은 직접 양봉도 하고, 닭을 기르면서 무실(務實)의 중요성을 체험했다. 조카인 이병휴에게 편지를 보내어 "너는 이미 실학에 종사하고 있으니, 마땅히 실무에 뜻을 두고 헛된 일을 하지 마라."고 충고하기도 했고, 고을 수령으로 있던 조카가 그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고기를 보내주자 그 고기를 돌려보내면서 "이런 것은 열의 아홉은 농민의 고혈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 풀뿌리로도 배고픔은 이길 수 있지만 고기는 필경 토해낼 것 같아서 그냥 돌려보낸다."라며 수령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훈계하기도 힌다.

정조 때의 학자이자 재상이었던 채제공은 "내가 일찍이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첨성리의 선생 댁을 찾아뵈었는데, 처마가 낮은 왜소한 집에 정좌해 계시는 선생의 모습은 눈빛이 날카로워 사람을 꿰뚫는 것 같았다.경전을 논하는 데에 고금을 두루 통하였고 그 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도 들을 수 있었다."며 그의 꼿꼿한 모습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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