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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의릉, 소론의 지지로 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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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의릉, 소론의 지지로 왕이 되다.

 

능의 구성

의릉은 20대 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경종 능의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오른쪽은 아래로 내려오게 조각되어 있다. 이와 달리 계비 선의왕후 능의 망주석 세호는 경종 능과 반대로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능의 역사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사적 20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생애 이야기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렀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가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720년 6월 13일 경덕궁 숭정문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간의 재위시절에도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재위기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일화

1721년(경종 즉위)과 1722년(경종 2) 신축, 임인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

(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년(경종 즉위) 8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과정에서 노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였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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