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윤봉길 의사,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반응형

 

 

윤봉길 의사,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결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였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하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을 덮쳐 구타하였다. 윤봉길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형순간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 윤봉길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와 대우였다.

 

사후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말뚝 테러 사건이 벌어졌다.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 연관글

[역사보기] - 의열단,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무장독립운동단체, 공약10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