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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분쟁, 누가 먼저 발견하였고 실효 지배를 하였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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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분쟁, 누가 먼저 발견하였고 실효 지배를 하였는가? 

 

독도 분쟁이란, 독도에 대해 대한민국과 일본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여 생긴 영토 분쟁을 말한다. 독도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해에 위치하고 있고,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주변의 암초 등을 포함한 총면적은 0.188 km2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하에 있다. 독도 분쟁은 19세기 이전, 독도에 대한 지배 및 관할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역사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 대한민국 측은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 문헌을 인용하거나 고지도에 기록된 우산도 등을 근거로 하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며 19세기 이전부터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측은 우산도가 울릉도, 관음도, 죽도 또는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고 주장하며, 우산도가 독도라는 한국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이전의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나오는 독도는 그 명칭이 여럿이었기 때문에 고문헌만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들을 확인하는 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우산도를 독도, 일본은 독도가 아닌 섬으로 정의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각 측의 주장 

독도를 둘러싼 쟁점은 다음처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누가 먼저 발견하였고, 실효 지배를 하였는가?

1905년의 일본의 시마네 현 고시에 의한 독도 편입은 유효한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독도 처분의 해석은 어떠한가?

 

이하에서 이것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을 정리한다.

 

누가 먼저 발견하였고, 실효지배를 하였는가

국제법상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발견"은 미성숙 권원(inchoate title)으로 취급된다. 영유권(권원)은 합리적인 기간의 "실효지배"에 의해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더욱이, 사람이 없거나 정주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잠깐의 실효지배 증거로도 가능하지만, 그 증명에는, 과세나 재판기록과 행정, 사법, 입법의 권한을 행사했던, 이의 없는 직접적 증거가 요구되어 불명확한 기록에 의한 간접적 추정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분쟁이 표면화된(결정적 계기) 이후의 실효 지배는 영유권의 근거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측 주장의 요약

1145년에 편찬되었던 《삼국사기》 에 의하면, 512년에 우산국은 신라 하슬라주의 군주인 이사부의 군대가 우산국을 정벌하서 신라에 복속되었다. 나중의 문헌에 있는 우산도는 이 우산국의 일부이고, 그 우산도는 독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독도는 512년부터 한국의 영토이다. 1454년에 편찬되었던 《세종실록》에 "우산, 무릉 두 섬은 현 정동진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 두 섬은 부속 관계이고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이 있다.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무릉)에서 독도가 보이므로, 독도가 우산도에 해당된다. 우산국은 512년에 신라에 복속되었으니, 독도는 한국 영토다. 1667년에 일본의 松江박사가 쓴 『은주시청합기』에는「이 두 섬(현재의 울릉도와 독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에서 보기에는 운주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 같다(주: 운주와 은주는 모두 현재 일본 시마네 현의 일부). 따라서 일본의 북서 지방에서 이 두 주를 갖기 힘들다고 생각된다..」고 쓰여 있다.

「이 주」는 온주에 있는 일본 땅의 한계를 오키 섬으로 하여, 이 시대에, 마쓰시마(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1728년에 편찬되었던 『숙종실록』에는, 1693년 안용복이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게 항의하여 「우산도는 조선의 영토다」라는 서약을 받았었다. 1696년 조선의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인에 항의하여, 「송도는 바로 자산도(독도)로, 이것 또한 우리의 땅이다.」고 말하고 있다.

1696년의 안용복의 항의에 의해 울릉도와 우산도의 귀속을 둘러싸고 에도 막부와 조선과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지만, 돗토리 번은 막부에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자기 번이 아니라고 회답하였다.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울릉도)를 방치하기로 전했기 때문에 울릉도의 부속도인 송도(독도)도 동시에 방치하였다. 1770년에 편찬되었던 『동국문헌비고』에「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으로, 우산은 즉 왜의 소위 마츠시마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우산은 독도에 해당한다.당시의 일본은 독도를 마츠시마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영토에 해당한다.

1808년의『만기요람』이나 1908년의『증보문헌비고』에도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1785년에 완성된, 일본의 『삼국통람도설』에 죽도(울릉도) 와 그 부속도인 우산도(독도) 가 그려져 있고, 조선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조선의 영토임을 명기하고 있다. 일본의『일본여지도고』, 『일본국지리측량지도』, 『관판실측일본지도』, 그 외 다른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당시 일본명칭이었던 마쓰시마가 기재되어있지 않다.

기재되어있는 지도도 오키 제도나 돗토리 현과 같은 색이 아닌 무색으로 되어 있다. 일본은 마쓰시마를 조선의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많은 조선의 고지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의 근처에 그려져 있다. 이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를 가리키고 있다.

 

일본 측 주장의 요약 

『삼국사기』에는 우산국에 해당하는 울릉도에 대해 설명되어 있지만, 주변의 섬에 대해서는 전혀 서술하고 있지 않다.「별칭을 우산도라고 말한다」는 대목은 울릉도의 별칭이 우산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에 512년에 울릉도를 침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라고 하는 기술이 있어, 울릉도의 기술밖에 없다. 독도에 해당하는 기술은 없다. 1431년에 조선에서 편찬된 『태종실록』의 태종 17년(1417년)의 항목에 우산도라는 이름이 처음 표시된다.

거기에는「안무사(安撫使)인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에서 돌아왔을 때, 큰 대나무나 물소 가죽, 파 등을 가지고 왔으며, 3명의 주민과 같이 왔다.

그리고, 그 섬에는 15호의 집이 있고 남녀 합쳐서 86명이 살고 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실제로 독도는 험한 바위섬으로, 사람이나 물소는 물론이고 대나무나 파 등도 사는 환경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가 아니다. 1530년에 조선에서 발행된『팔도총도』에 처음으로 우산도가 그려지지만, 울릉도의 서쪽이며, 울릉도와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그 후의 지도에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크기나 위치에 그려져 조선 정부는 우산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의 고지도의 우산도는, 전부 울릉도의 근처의 죽서도에 대응시킬 수 있다. 따라서 ,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가 아니다. 1618년에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죽도(울릉도)도해 면허가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두 집안에 내려졌다.송도(현재의 독도)는 어로나 울릉도로의 중계지로 이용되었다. 그 이전의 조선인이 이 섬을 이용했다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은주시청합기』의 글 중에는「북서쪽으로 1박 2일 가서 마츠시마(현재의 독도)가 있다. 또 하루 정도에 다케시마(울릉도)가 있다. 풍속에 기죽도(磯竹島)라 하여 대나무, 물고기, 강치가 많다. 이 두 섬은 무인도이다.」라고 하여, 현재의 독도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울릉도에는, 이 문헌의 50년도 전부터 막부의 허가를 받아 호키의 요나고에서 어로나 대나무의 벌채 등을 위해 건너가 있어, 중간의 「이 주」라는 것은 울릉도를 가리킨다.

조선의 어부였던 안용복은 울릉도나 일본에 밀항했던 범죄자였다. 조선의 『숙종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안용복의 심문기록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우산도를 송도(현재의 독도)라고 하고, 일본인을 쫓아 가서 송도에 건너갔다고 했는데, 죄를 덜기 위해 위증을 했다고 생각다.

처음부터 안용복은 우산도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쇼군이 조선의 어부에게 죽도(현재의 울릉도)나 송도에서 손을 떼겠다고 한 서약을 전한 적이 없다.『동국문헌비고』의「울릉, 우산은 둘 다 우산국의 땅으로, 우산은 곧 왜에서는 소위 마츠시마라고 한다.」라는 문장을 시작하는 같은 모양의 문장에는, 거짓말이 많은 안용복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 당시의 조선의 지도에서 보듯이, 조선정부는 죽서도를 일본인이 말하는 마츠시마라고 오인하고 있다. 일본의 삼국통람여지도정전도에 그려져 있는 죽도(울릉도)의 북동쪽에 남북으로 긴 작은 부속도가 있지만, 섬의 크기나 형태, 위치관계로 보듯이, 이것은 현재의 죽서도에 해상한다. 이 지도에 현재의 독도는 그려져 있지 않다. 당시는 이미 이 지도보다 훨씬 정확한 경도-위도선을 도입한 『개정일본여지도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図』가 보급되어 있었고, 죽도(현재의 울릉도)와 송도(현재의 독도)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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