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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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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민회빈 강씨(한자愍懷嬪 姜氏, 1611년 ~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본관은 진주이다.

 

가례

 

본관은 금천이고, 1611년 한성에서 우의정이었던 강석기의 딸로 태어났다.

1627년, 만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이 되어 소현세자와 결혼하였다.

 

인질과 석방

 

1636년 병자호란을 발발 후 이듬 해 1637년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되고, 강화조약에 따라서 소현세자와 19세의 봉림대군

(효종)과 그의 부인 장씨(인선왕후)와 함께 청나라 선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1644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이 멸망하자, 1645년 정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마치고 조선에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반청노선에 반기를 드는 소현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불화는 계속된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 뒤

인 4월 23일 인조의 어의 이형익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소현세자가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입관을 서둘렀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

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밝게 했다.

 

참관 인원도 일부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했다.

 

조소용과의 갈등과 법살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조소용(훗날의 귀인 조씨)이 인조를 저주했다고 강빈을 무

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문안도 거부한다.

 

1646년 정월 강빈 궁 소속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강빈은 이 혐의로 별당에 유

치되고,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에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당한다.

1646년 강빈의 죽음 이후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진다.

 

그곳에서 1648년 첫째 석철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은 작은 아버지인 효종 때에 귀

양에서 벗어났다.

 

사후

 

강빈과 그녀의 아들들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일파의 정치공세성 성격이 짙었으므로 김집 등은 효종 때 경

안군(강빈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서인 산림 계열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 보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으로부터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효종 즉위후 5년째 되던 해에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 김홍욱은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며 억울하게 옥사로 죽은 강빈의 신원

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조선 숙종은 1718년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평가

 

당대에 이미 법살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 동정되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주장했던 황해도관찰사 김홍욱은 장살로 고문치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의 죽음은 금기사항이었지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은 계속 그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주장하여 결국 숙종때에 가서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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