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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항몽전쟁을 선언하고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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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항몽전쟁을 선언하고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하다.

 

최우(崔瑀, ? ~ 1249년 12월 10일 (음력 11월 5일))는 고려 중기의 무신(武臣), 권신(權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후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의 아들이다. 원종의 국구 김약선은 그의 맏사위이며, 충렬왕에게는 외외증조부가 된다. 정순왕후의 외할아버지이다.1219년부터 1249년까지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부활시켜 관료의 인사권을 탈취한다. 글과 서예에 능하였으며, 몽골의 침략의 조짐이 보이자 항몽 전쟁을 선언하였다. 팔만대장경의 간행에도 기여하였다. 나중에 이름을 이(怡)로 개명하였으나,고려사 반역 열전에 최우 라고 기록한 이후, 집권때까지의 본명인 최우 로 통용된다.

 

생애

처음 이름은 우(瑀)였으나, 집권 이후에 이(怡)로 개명한다. 1219년(고종 6) 9월에 아버지 최충헌이 죽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과 재산

들을 모두 각각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 민심을 얻었다. 이어 한사(寒士)를 등용했으며, 동생 최향(崔珦) 및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를 보내거나 파면하였다.

집권과 항몽전쟁 준비

1222년(고종 9) 참지정사 이병부 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었으며 무신정권의 전복을 꾀하려는 시도를 발각, 모두 제거, 숙청하면서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무렵 몽골의 사신이 자주 와서 많은 금품을 요구하자 이를 냉정히 대접하고는 항몽을 선언하고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開京)의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여 몽고의 침입에 대비했다.

 

인사권 장악과 권력 강화

그러나 아버지 최충헌 사후 문신들과 왕실이 인사권을 장악해 나가자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자택에 설치하여 문신과 왕실로부터 관료의 인사권을 탈취하여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書房)을 두어 문객 중의 이름난 선비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삼번제(三番制)로 도방과 함께 숙위를 담당케 하고, 아버지 때의 도방을 외(外)도방, 자기의 가병(家兵)을 내(內)도방으로 하여 저택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 도방(都房)의 병력을 확장, 증원하여 사병(私兵)을 증강했다. 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의 호를 받고, 29년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 격구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여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어서 원성을 샀으나 왕실은 그를 처벌하지 못했다. 1231년 그의 처가 죽자 왕은 온갖 비단 70필을 하사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케 했다.

북변에 침범했던 몽골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 천도를 청하고 녹전차(祿轉車) 1백여 대로써 자기 재산을 강화에 옮긴 뒤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케 했다.(강화도 천도) 이듬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가병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고, 1234년(고종 21) 강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몽골과 전쟁 준비

1243년(고종 30) 문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신전란을 겪는 가운데 파괴된 국자감(國子監)을 수축하고 양현고에 쌀 3백 곡(斛)을 양현고(養賢庫)에 내놓는 등 장학(獎學)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개인의 재산을 희사하여 대장경판(大藏經版) 재조(再雕)를 완성하게 하였다. 이후에 차츰 전횡을 자행, 횡포가 심해져서 백성의 원망을 샀다.

한반도 본토에서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강화도에서 어용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고 사치를 부리는 등 횡포가 끊이지 않았다.1249년 초 최우는 몽골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그해에 갑자기 사망했다.

사후

1262년 천도공신(遷都功臣)에 추증되었고, 공신으로서 1262년 그해에 공신당(功臣堂)의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벽에 이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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