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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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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하다.

 

문종(文宗, 1414년 11월 15일 (음력 10월 3일) ~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재위 1450년 ~ 1452년)은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휘는 향(珦)이며, 는 휘지(輝之)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문종은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자 소헌왕후의 소생 중 첫째로 출생하여 1421년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세자로 책봉된 다음해인 1422년에 조부인 태종이 세상을 떠난다. 젊은 나이에 일찍 혼인하였으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 온갖 잡술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고, 두 번째 아내였던 순빈 봉씨는 폭력적이고 동성애적인 기질로 나인 소쌍과 동침하여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이미 후궁으로 들어와 있던 권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권씨(현덕왕후)는 왕세자빈 시절이었던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1일 만에 죽고 말았다. 문종은 어렸을 때부터 인품이 관대하고 후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학문을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할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언관의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폄으로써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쓰는 등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곁에서 보필하였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음력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대리청정을 한 덕분에 공백기간 동안 정사 처리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종 역시 병약하였고 세종은 문종을 염려하여 병석에서도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의 안부를 당부하곤 하였다. 1450년 3월에 즉위하여 바로 명나라에 책봉 주청사를 보냈고, 그해 음력 5월 명나라로부터 책봉 고명을 받아 정식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왕세자 시절에 진법을 편찬했을 만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하였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의 과중한 업무와 공부로 인해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데다가 임금으로 즉위한 후에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자주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하여, 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가 잠시 섭정을 맡았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현릉(顯陵)

에 능을 조성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원래 소릉에 안장되었다가 계유정난 이후 1457년 추폐되어 재궁이 바닷가에 버려졌었고, 중종 7년 1512년에 현릉에 같이 묻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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