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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부친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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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부친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다.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822)신라41헌덕왕 때 김헌창이 자기의 부친 김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갖고 일으킨 반란이다. 신라 말기는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으며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 반역, 골육상잔의 난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80040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상대등에 오른 원성왕계 자손인 김언승(이후 41대 헌덕왕)은 세력을 쌓아 조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80941헌덕왕에 오른다. 이때 태종 무열왕계 자손으로 왕위 경쟁을 벌이던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 중앙정계에 남아 807에는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상대등 김언승에 버금가는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809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은 근친 혈족 위주로 정국을 운영함으로써 다른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김헌창의 난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김헌창은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며, 진주(武珍州:광주), 완산주(完山州:전주), 청주(菁州:진주), 사벌주(沙伐州:상주)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충주),서원(西原:청주), 금관(金官:김해) 등의 관리들과 모든 군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했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밀양)으로 갔으며, 한산(漢山:광주)·우두(牛頭)·삽량(?), 패강(浿江), (北原:원주) 등에서는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수비하였다. 완산(完山:전주)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의 도움으로 도읍지 금성(경주)으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장군 8명으로 서울을 지키게 하고 장웅(長雄)·위공(衛恭)·제릉(悌凌)으로 헌창을 치게 했다. 장웅은 도동현(道東峴)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報恩)을 공격한 다속리산에서 헌창 군을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은 성산(星山)에서 승리하고, 여러 군이 웅진에 모여 김헌창의 군대를 격멸시키니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다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김헌창은 자살했다. 그 후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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