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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백제의 장수로서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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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백제의 장수로서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다.

 

 

흑치상지(黑齒常之, 630년~ 689년)는 백제의자왕달솔을 지낸 백제 · 당나라의 무장이다.

660년부터 663년까지 3년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흥운동의 실패가 확실해지자 당나라에 항복하고 투항했다.

 

백제의 장수로서

 

 

1929년 중국 낙양(洛陽)에서 아들 준(俊)의 것과 함께 출토된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원래 백제의 왕족으로서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文大), 조부는 덕현(德顯), 아버지는 사차(沙次)이며, 흑치상지의 어릴 적 이름은 항원(恒元)이었다.

 

《신당서》및 《삼국사기》에 입전된 그의 열전에서는 의자왕 때 벼슬은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군장(郡將)을 겸하고 있

었다고 적었다.

 

660년 당(唐)소정방(蘇定方)신라김유신(金庾信)이 각자 지휘하는 18만 나ㆍ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수도 사비성

을 점령한 뒤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하지만 당의 소정방이 의자왕을 포로로 삼아 온갖 모욕을 주고 군사를 풀어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갖은 약탈을 일삼자, 두려

움을 느낀 그는 1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임존성(任存城)으로 도망쳐 백제 부흥운동에 가담, 당에 항거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열흘 만에 3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소정방은 흑치상지를 치려 했으나 패배했고, 흑치상지는 그 기세를 몰아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661년에서 663년 무렵에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부흥군의 수장이었던 귀실복신(鬼室福信)이 함께 거병

했던 도침(道枕)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했다가 다시 풍왕(豊王)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663년 백강 어귀

에서 당병에게 대패한다(백강구 전투).

 

이 무렵 당 고종의 계속되는 초유(招諭)를 받고 있던 흑치상지는 결국 고종의 초유를 받아들여, 함께 백제부흥군 편에서 싸우

던 별부장 사타상여와 함께 당에 항복했다.

 

이때 그는 당으로부터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ㆍ양주자사(佯州刺史)로 임명되었으며, 유인궤의 주선으로 백제 부흥

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임존성 공격에 앞장서는 등 당의 장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당의 장수로서

 

당 고종 의봉(儀鳳) 2년(677년)에 티베트가 당을 공격했을 때, 당 조정은 유인궤에게 조하(洮河)로 출진하게 하여 여러 차례

베트와 전투를 치렀는데, 흑치상지는 유인궤의 부장으로서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 나아가 티베트 전선에

입된다.

 

의봉 3년(678년), 당 고종이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로 삼고 군의 대총관으로 삼

아, 티베트의 명장 가르친링)과 칭하이 호(靑海湖) 일대에서 맞서게 되었다.

 

7월, 양측은 청해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측의 적수군대사(赤水軍大使) 유심례(劉審禮)가 티베트군을 쫓아 깊숙히 들어갔

다가 포위되어 그만 9월에 전군이 패배하고 몰살당했다.

 

이경현의 군은 승풍령(承風岭, 지금의 칭하이 성 시닝 부근)까지 물러났으나 자신도 티베트군에 포위되는데, 흑치상지가 결

사대 500인을 모아 티베트 군영에 야습을 감행하였고, 티베트의 수령 발지설(跋地設)은 패하여 달아나고 이경현은 간신히 포

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흑치상지는 좌무위장군(左武僞將軍)으로 승진하였으며, 나아가 하원군부사(河源軍副使)가 되었다.

 

조로(調露) 2년(680년) 7월, 흑치상지는 군을 거느리고 양비천(良非川)에서 다시 가르친링을 패주시켰으며, 이경현을 대신해

하원군경략대사가 되어 하원 지역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흑치상지는 현지에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군의 비용으로 충당했는데 그 크기가 5천여 경에 달했으며 해마다 백만여 석의 곡

식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한 봉수대 70여 곳을 만들어 하원 지역의 방어력을 높였다.

 

개요(開耀) 원년(681년)5월 21일에 흑치상지가 이끄는 정병(精兵) 1만 기(騎)가 청해 둔전을 공격해 온 티베트의 갈이(噶尔)·

찬파(赞婆) 등을 패주시키고 2천 급을 베었으며, 티베트군의 군량을 불사르는 전공을 세웠다.

 

흑치상지가 청해에 머무른 7년 동안 티베트는 당의 영토를 넘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성(嗣圣) 원년(684년), 흑치상지는 다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이 되고 거듭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집권한 뒤,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무후는 흑치상지 등의 번장들을 우대하였다.

 

684년서경업(徐敬業)이 양주(扬州)에서 측천무후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였을 때, 측천무후는 11월 4일에 흑치상지에게 군을

느리고 막게 했고, 11월 18일에 서경업의 군을 진압한다.

 

수공(垂拱) 원년(685년), 흑치상지는 처음으로 전국의 변방 업무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수공 2년(686년), 돌궐의 카간인 쿠틀룩(骨咄禄)이 하동도(河東道)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좌응양위대장군(左鹰

扬衛大将军)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总管)이 되어 양정(两井)에서 돌궐군을 상대로 전투를 거두고 많은 가축을 노획

한다.

 

이 공으로 흑치상지는 연국공(燕国公) 식읍 2천 호의 작에 봉해졌다.

 

수공 3년(687년)에 돌궐은 다시 당의 삭주(朔州)를 침공했는데, 흑치상지는 이때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으로서 신무

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 채워져 이다조(李多祚), 왕구언(王九言)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돌궐과 전투를 벌여, 황화퇴

(黄花堆)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여 리를 뒤쫓아 돌궐을 사막 쪽으로 몰아낸다.

 

당시 우감문위중랑장(右監門衛中郞將) 찬보벽(爨宝璧)이 조정에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 것을 청했고, 측천무후는 흑

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직을 주어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함께 돌궐을 쫓게 했다.

 

그런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사전 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하여 1만 3천 명에 달하는 전군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보벽이 옥리에 내려 죽이고 흑치상지도 공이 없음을 문죄당하였는데, 주흥(周興)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더

불어 반역했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689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흑치씨의 유래

 

흑치상지 묘지명에는 흑치씨의 조상을 백제의 왕족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흑치를 성으로 삼게 된 이유를 흑치(黑齒)

방에 책봉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고대인의 인명 및 성씨는 한문의 뜻이 아닌 음차 또는 훈차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노중국 교수는 흑치를 검은니의 훈차로 설

명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黑은 검다는 의미로 금(今)을 훈차한 것이며 齒는 내(川)라는 의미로 물(勿)을 훈차한 것으로, 백제 금물현

(今勿縣 : 충남 덕산)으로 비정된다.

 

한편 이도학은 흑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흑치국의 위치인 필리핀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비슷한 논

리를 적용하여 이를 검게 물들이는 문화가 존재하는 지방을 흑치국이라 단정하는 견해가 누리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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