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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왕족 출신의 고승, 화엄종의 시조이며 부석사를 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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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왕족 출신의 고승, 화엄종의 시조이며 부석사를 창건하다.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또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며, 속성은 김(金: 혹은 박(朴)씨라고 함)이다.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다.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師兄)인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 산(終南山) 지상 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당나라에 체류 중 그의 설법에 참석하던 여성 중 그를 사모하는 선묘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던 날, 선묘의 집에 찾아갔지만, 선묘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접한 이 선묘는 자신이 죽어 그를 지켜주겠다며 황해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의상이 영주 봉황산에 산사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와서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어느 날 사람 수백 명의 머리를 덮고도 남을 크기의 바위가 공중에 떠다니면서 주민들을 따라다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였고, 의상은 사찰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효소왕 1)에 현수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78세였다. 후일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과 전교(傳敎)의 10대찰이 있었다. 신라고승 원효(元曉)를 사형(師兄)으로 섬겨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밀단(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범어사의 전설에 따르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

거 있는 것은 아니다.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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