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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거창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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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거창군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 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는 조선 연산군(燕山君)의 왕비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생애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세종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아버지 신승선임영대군의 딸과 혼인을 하는데 그의 생모가 된다. 아버지는 두번에 걸쳐 장원 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이며, 그녀는 왕실 유례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 간택을 통해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졌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가 되어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된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덕이 있었다. 1495년에는 적통공주인 휘신공주를,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왕실의 적통장자인 원자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녀의 덕을 높이사고 황금으로 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중종반종 당시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의 존호를 받았으나 바로 이듬해인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郡夫人)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신하와 중종은 그녀에게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였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嬪)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를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5남 2녀라는 말도 있으나 그것보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더 많았다.

7남 2녀 혹은 7남 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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