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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논란과 의혹,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단점에도 세종의 신임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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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논란과 의혹,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단점에도 세종의 신임을 받다.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는 고려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조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아들과 사위가 저지런 뇌물수수 ,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청빈함 논란

고려말과 조선 전기의 관료였던 황희에게는 직급 수준의 과전(科田)을 지급했다. 과전을 빼앗긴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준 장본인이 바로 세종 임금이다. 그 점을 아래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4년 3월 18일에 세종 임금은 유배에서 복직된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세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황희는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을 지지하다가 교하(交河)와 남원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자신을 반대한 황희를 복권시키면서 그에게 과전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관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견해에 대하여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세종 자신이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는데, 막상 황희가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감탄사를 터뜨리기보다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세종이 방문하였을 때에 그가 초라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에 그는 정부로부터 과전을 지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에 다시 집안을 일으켰으며,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등이 있었으므로 크게 탐욕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다.

그는 분명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청렴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후대에 그를 신격화, 미화하는 과정에서 청빈함과 가난함으로 과장되었다.

 

의도적인 청렴함과 정치적 약점

청렴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 직책의 존폐 논란이 최소화될 수 있고, 또 세력이 없는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직에 대한 군주의 견제가 완화되는 동시에 재상이 된 동료 관료의 권력 독점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희 역시 실소득과 관계없이 청렴한 생활을 대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양반 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재상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사치를 피하고 청렴을 선택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 뒤에는 그 같은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황희 스스로가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는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는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건국을 반대하면서 한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었다. 1416년에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는 번번이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또 그런 뒤에는 매번 지조를 꺾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희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고,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흠 잡힐 만한 행동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사위의 죄악 은폐 논란

황희의 사위가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살인 사건은 조용히 은폐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샀는데, 이때 일부 선비들의 공론에 의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의정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사헌부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한다.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실세라고 불리던 황희-맹사성이 동시에 수습에 나섰으니 그 왜곡과 조작이 심하였다. 이 사건은 두 정승인 황희와 맹사성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마는듯 했지만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기 시작하자 그 배후에 여러 지방 관아 수령들 뿐 아니라 형조판서 서선이 직접적으로 사건 은폐를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선의 배후에서 편의를 봐주고 있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아."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맹사성과 황희를 파직했다가 불과 7일 만에 다시 기용하는 또 한번의 파격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친인척 부패 옹호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사간원에서 소문만 듣고 일처리를 했다며 글을 올려 변명하여 처남들을 구(救)하였다.

 

간통, 범죄자 은닉 논란

그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고 실록은 적는다. 여러가지 비리 사건에 휘말린데다가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는 간통죄와 살인자 은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포(朴苞)는 '제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오히려 이사실을 알게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회안대군 방간을 조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난이 방원의 승리로 끝난후 박포는 방간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참수된다.

이 때 박포의 아내는 살인 후 도망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에 토굴을 짓고 그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를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박포의 아내가 충청북도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집안의 다른 종 중 한명이 이를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한성부에 들어왔다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는 그의 집 북편의 토굴을 본 누군가에 의해 새어나가 각지로 소문이 확산되었다.

 

청탁 논란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 주려고 하여 또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기타 논란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서자의 변성(變姓)하여 조(趙)씨라고 하게 했다.

그러나 왕조실록에는 황희가 내섬시의 여종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라 한다. 그에 의하면 "처음에 영의정 황희(黃喜)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婢]을 첩(妾)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황중생(黃仲生)이라 하였다."고 한다.

 

긍정적 평가

성격이 원만하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또한 대대로 관료가문이라 풍부한 재산이 있었으므로, 가렴주구와 축재를 하지 않아 백성들의 칭송을 듣기도 했다.

 

비판

그러나 어느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아들의 벼슬을 주는 대신 그에게 땅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땅과 벼슬자리를 교환하자는 거래라며 사대부들의 비난이 있었고, 황희의 비리 사건을 포착한 사헌부는 그 즉시 황희의 비리 사건을 조정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으며, 삼사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 처벌이 불가능했고,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심해지자 세종은 임시방편으로 황희를 잠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얼마되지않아 다시 영의정부사로 기용한다.

 

맹사성, 윤회와의 비교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교 비판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그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음을 주장,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하여 만년의 태종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년에 세종 이 궁중 내에 법당인 내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조선의 건국이념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려와 승도 600명을 노역에 동원하여 풍저창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치다

두 여종이 서로 상대방이 서로 잘못했다며 싸웠다. 그는 두 여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은 후 한 여종에게 네말이 옳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역시 네 말도 옳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한 여종의 말도 옳고 다른 여종의 말도 옳다면 누가 잘못했는가? 혹은 한 여종이 옳다면 다른 여종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손님들 역시 부인의 견해에 동의했다. 황희는 부인의 말도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항상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은 눈여겨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절대 모르는 법'이라며 지적했다. 두 여종과 부인은 물론 손님들도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한다.

 

아들에 대한 교훈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기생과 절연하라는 충고를 무시하자 관복(冠服)을 입고,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니 앞으로 손님의 예로써 대하겠다”고 인사해 아들에게 통절한 반성과, 기생과의 절교를 끌어냈다고 전하고 있다.

황희는 아들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자 황 정승은 관복 차림으로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 정승은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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