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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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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습니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습니다.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습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습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습니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옵니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代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습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후 지은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습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칩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합니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합니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보살이

각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립니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습니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菩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합니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다 하겠습니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원숙한 조법과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입니다.

절대적인 경지인 정각을 통해 인간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존재인 석가여래가 되고, 속세는 법계라는 이상향이 됩니다.

 

 

 

 

 

문화 유산적 가치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Ⅰ), (Ⅳ)

 

(Ⅰ)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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