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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일왕, 무조건 항복 선언 디지털 복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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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일왕,  무조건 항복 선언 디지털 복원 공개

 

쇼와 천황 또는 일왕,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이다.

본명은 히로히토), 문화어: 히로히또)이며, 어릴 적에 쓰이던 궁호(宮號)는 미치노미야이다. 또, 쇼와 천황이 사용하오시루시어린 대나무를 상징했다. 다이쇼 천황(요시히토)과 구조 공작 가문의 당주 구조 미치타카의 딸 데이메이 황후(구조 사다코)의 맏아들이다.

1921년에 부황 다이쇼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으며, 1926년 12월 25일에 즉위하여 1989년에 죽을 때까지 재위했다. 메이지 천황이 확립한 일세일원제에 따라 재위 기간 동안 쓴 연호쇼와( 단 하나뿐이었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부황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한 그는 즉위 이후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이 실권을 잡았으며 1944년부터 이듬해 1945년까지 다시 1년간 친정을 하였고 연합군에게 무조건 투항을 선언한 1945년부터 이듬해 1946년까지 미국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년간 실권을 잡았으며 다시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윌리엄 시볼드 주일 미국 대사가 6년간 실권을 잡았다가 1952년부터 1989년에 붕어할 때까지 또다시 친정하였다.

히로히토가 천황 자리에 오르던 1920년대 전후반, 일본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불황 상태에 빠져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통제파, 황도파,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등의 여러 사상이 대립하였다. 1930년대 초, 수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들의 비호 아래 쇼와 천황과 그 측근들은 일본 군부의 중국 침략, 동남아시아 침략을 묵인했다. 또,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장군과 제독의 임명과 승진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의 대외 침략 전쟁을 도왔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자, 쇼와 천황은 일본으로 진주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인사들과 유착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범 기소와 황위 박탈은 면했지만 연합군은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완성하면서 쇼와 천황, 그리고 앞으로의 천황들의 정치적 실권을 빼앗았다. 정치적 실권을 잃은 쇼와 천황은 해양생물학 연구에 매진하는 등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쇼와 천황은 죽은 뒤에도 일본 제국이 자행한 전쟁과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항복 선언

항복을 반대하던 군대는 궁성 사건을 일으키고, 아쓰기가스미가우라 호의 비행장에서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쇼와로부터 지지를 잃으면서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군대의 저항이 일단락된 후 항복 선언의 사전 작업으로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미국과 연합군 각 정부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지했다.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이 전날에 녹음한 일명 옥음방송(玉音放送)이 라디오를 통해 퍼졌다.

 

짐은 깊이 세계의 형세와 제국의 현상에 비추어보아 특단의 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려고 하여, 이에 충성스럽고 선량한 그대 백성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다.

무릇 제국 백성의 안녕을 꾀하고 세계만방이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예로부터 황실 조상이 남긴 법도로서 짐이 삼가 신불에 바친 바이다. 앞서 미국·영국 두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을 뿐으로, 다른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그 영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바는 처음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쟁은 4년이 지나면서, 육해군 장병이 용맹히 싸우고, 문무백관이 근면히 일하고, 일억 백성이 멸사봉공하여도 국면을 호전시킬 수 있을 정도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혹한 폭탄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참담한 피해를 입힌저, 참으로 전쟁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 일찍이 제국은 교전을 계속하였으나, 이로써 마침내 우리 민족은 멸망에 치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마저 무너질 위험에 놓여 있다. 짐이 어떻게 해서든 수많은 제국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황실의 신령께 사죄하며,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성명에 응하게 한 연유가 이와 같다.

짐은 제국과 함께 줄곧 동아시아의 해방과 공영을 위해 노력한 여러 우방들에 대해 안타까운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고, 일하던 곳에서 죽고, 또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과 그 유족들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것 같다. 이제 부상을 당하고 재난을 당하고, 가업을 잃은 이들의 후생복지를 짐은 깊이 마음에 두는 바이다. 앞으로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일찍이 어림한 바보다 더 클 것이다. 그대들 백성의 충정을 짐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짐은 이제 시운(時運)을 따르는 바, 고난을 참고 견디며 후세를 위해 평화로운 세상을 열려 한다.

짐은 국체를 지킬 수 있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그대 신민들의 일편단심을 신뢰하며 항상 그대 백성들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 허나 짐에 대한 충성이 격해져 함부로 일의 발단을 번거롭게 하고, 동포를 물리치고, 시국을 어지럽게 하여 대의를 그르치고, 세계로부터 신의를 잃는 일을 짐은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온 나라 한 집안 자손이 서로 확실히 전하여, 하늘이 주신 땅이 불멸함을 믿고,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공고히 하리라 선서하고 국체의 정수를 앙양하고,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이 뜻을 꼭 마음에 두고 지키라.

 

하지만 옥음방송을 녹음할 때 녹음한 판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쇼와 천황이 사용한 언어는 궁정체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쇼와 천황의 뜻을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옥음방송이 있은 뒤 아나운서 와다 노부카타가 조서 전문을 해설을 덧붙여 풀어서 읽었다. 와다는 “천황 폐하께서는 폐하의 명을 받들지 아니하고 무기를 자진해 거두어들인 백성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짐의 이 한 몸은 어찌되든 간에 더 이상 국민이 전화에 쓰러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국민에 대한 큰 자비와 사랑을 내려주신 천황 폐하의 성은을 입은 백성들 중 어느 누가 자신의 불충을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사흘 뒤인 8월 17일에는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의 전장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 해제를 명하는 《육해군인에게 내리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됐으며, 일본 제국이 강제로 지배하고 있던 조선은 해방되었고 타이완은 청나라를 계승한 중화민국을 이끄는 장제스에게 반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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