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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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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다.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다.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의 씨 몇 개를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이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해지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목화 재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곡의 문인이다.

 

생애 초반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익점의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1328년 설과 1331년생 설, 1332년생 설 등이 전한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益瞻)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李穡)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익점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다.

 

원나라 왕환

1363년에 좌정언으로 재직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여 고려로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덕흥군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라는 견해도 있다.

 

목화 밀반입

운남에서 문익점은 사람들이 목화를 심어 옷을 해 입는 것을 보았다. 고려에서는 귀족들이나 왕족들만이 솜옷과 솜이불을 해 입었으므로 그는 이를 고려로 반입할 뜻을 품게 된다.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원나라는 법으로 목화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귀국할 때 수입 금지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귀국, 사행길을 마친 뒤 관직을 사퇴하고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반을 나눠서 목화를 재배한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자신의 시종인 김룡(金龍)과 함께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래 원나라의 어느 목화밭에 들어가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다.

 

목화 재배 성공과 시중 보급

3년 만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기계(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그가 심은 것은 실패하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 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가 된 것이다.

 

관료 생활

1374년 그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해서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감주부(典儀監注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37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진다.

 

신진사대부와의 갈등과 은퇴

성리학적 소양이 있던 그는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그해 8월 그 무렵의 토지에 대한 전제개혁(田制改革)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다.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사헌부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직하였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며,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진주로 물러났다.

 

은퇴와 최후

그는 기울어져가던 나라 일,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

1392년 이성계, 정도전 등이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한 문익점은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1400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가 있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그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면화를 가져와 민간에 보급하고,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평가되고 숭배되었다. 또한 그의 치적은 성리학의 초기 인사인 이곡의 직제자의 한사람이자 이색, 정몽주의 동문이었으므로 성리학 이념의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후

묘소는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고 묘 근처에는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세워져 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단성의 사당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1785년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山淸文益漸墓)로 지정되었다.

 

목화 전래의 영향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온 백성들이 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목면으로 포근한 과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는 무명 옷감으로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 도구 제작의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을 만들어서 일상용품 여러곳에 두루 다양하게 쓰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무명은 물물교환의 화폐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었다. 또한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다.

 

공로의 인정

1375년(우왕 1) 조정에서 문익점을 불러 이러한 공로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고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추진한 전제(田制) 개혁에 반대하여,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 뒤 정계에 뜻이 없어 고향(진주 강성현)에 하향했다.

죽은 후 조정에서는 문익점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후손으로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의 아들 셋이 있었다. 남평 문씨 대동보에는 문중성(文中誠)과 문중진(文中晉)이 추가로 나타난다.

조선 태종 때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여겨 후손인 문중용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세웠다. 세종 22년(1440년)에는 영의정에 추증,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고종 때에는 일부 유생들이 모든 백성의 만세에 이룬 공을 들어 이색과 함께 문묘에 모실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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