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다.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김기하,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송자는 동양 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 유학을 집대성 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 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대학자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이를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를 여는데 이론적 배경과 방향타를 제시한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 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일제는 조선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우암 폄하작업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우암은 '사대주의의 표상', '수구보수 사상의 원조', '사색당쟁의 원인 제공자' 등으로 잘못 인식되어 왔다. 이것은 우암의 사상과 기호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부진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긍정적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기하,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화양서원, 경기도 여주대로사, 수원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우암은 송익필, 율곡과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맥을 계승한 기호 사림의 중추적 인물이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였다. 북벌론으로 국가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조선중화사상을 정립하여 문화국가로 나아가는 방향타를 제시하여 영정조시대의 문화적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임모 충북대학교 총장은 "옥천에서 출생한 우암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충북의 화양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우암의 학문을 연구하는 일은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부정적 평가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이나 <효종실록> 등을 보아도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준비에 대해 기술한 것이나 조정에 건의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북벌이 단순히 명분이나 군사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의 의지가 결집되고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임진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현실을 직시하여 국왕이 내치를 다지고 국력을 모아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한 현실적인 판단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효종 사후에도 북벌을 주장하는 등 북벌에 대한 의지를 꺽은 적이 없으며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과 현실적인 여건상 북벌을 실행시키지 못한 점을 평생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대동법을 반대하고, 호포법에 무심하여 백성들의 삶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회적인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개혁에 앞장섰다. 단지 초기에는 스승의 반대 등으로 표면에 나설 수 없었으나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이를 장려하였다. 학문적 측면에서도 윤휴와 같은 인물은 주자의 해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을 한 반면 송시열은 주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윤휴와 같은 학자들의 지극히 부분적인 지식으로 주자학의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체에 반하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 것으로, 오히려 주자대전차의 등 수많은 저술을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주자학의 올바른 이해와 창조적인 해석을 통해 영정조시대에 꽃피운 우리 고유의 문화 창달과 융성에 굳건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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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보기] -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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