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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강화도령, 안동 김씨 세력들에 의해 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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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강화도령, 안동 김씨 세력들에 의해 왕이 되다.

 

철종(哲宗, 18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 1864년 1월 16일(음력 1863년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재위 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이자 대한제국 추존황제이다.

추존 군주 장조의황제(사도장헌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 는 이변(李昪), 본관은 전주(全州), 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는 대용재(大勇齋)이며, 사후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1908년(융희 1년)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로 유배간 후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안동김씨 세력들에 의해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치세

1849년부터 186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49년부터 1852년까지 종숙모(從叔母)이자 양어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였고 1852년부터 1864년 훙서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출생과 가계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 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李裀) 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李壙)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며,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범이었으며, 변이라는 이름은 그가 왕위에 즉위한 후에 개명한 것이다. 상계군 사건과 송마리아, 신마리아 사건의 영향과 은언군의 서자라는 점 때문에 생부 이광은 왕족으로 작위를 받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다가 만년에 석방되어 한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원경을 낳았고 첩실인 염씨에게서 원범을 얻었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 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 로 유배되었으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홍국영상계군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던 사건과, 정조 사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하던 것이 적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이후 순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한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아들여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한다. 1817년 순조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지어주는데 노론 대신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순조는 석방이 아니니 번거롭게 굴지 말라면서 넘어간다.

1822년(순조 22)에는 위리안치형에서 형을 감형하여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30년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36년(순조 36) 남응중 역모사건로 인해 그의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또 유배당하게 된다.

 

강화도 유배생활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 대에 농토를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일각에서는 그를 가리켜 강화도령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알고 지낸 강화 출신인 유력한 문인이자, 양명 학자였던 이시원(1790년~1866년)의 인품을 존경하여 중용하여 썼지만, 조정의 거대한 안김의 세력 다툼으로 참다운 정치를 펴지 못했다. 이시원은 1815년 (순조15)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816년 사간원 정언, 1833년 경기 어사를 지낸 유신이다.

 

즉위

1849년 (헌종 15년)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 이튿날인 음력 6월 8일, 창덕궁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철종이 항렬상 헌종의 부친인 익종과 같은 항렬로서, 익종의 후사가 될 수는 있어도, 선왕인 헌종의 후사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 더구나 안동 김씨들의 권력에 휘둘려 관리 한사람을 뽑는 데에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사도세자 서자였고,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였다. 서자의 손자인 서출인데다가 본인도 서자였고,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사대부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장형을 가하고 벌칙금을 부과하였으나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까지도 서자, 서출, 강화도령이라며 그를 조롱, 비하하는 발언을 암암리에 계속하였다.

 

즉위 초반과 섭정

철종은 5촌 당숙인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세 임금의 중전이 안동 김씨가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중궁전(대비마마가 사시는 곳)은 안동 김씨의 소유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하여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사는 세도가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어떤 일가가 사사로운 인맥으로 매관매직(관직을 사고 팜)으로 관직에 오르게 된 어느 시골의 관리가 한성에 입경한 뒤에도 국왕인 철종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군수에 임명되었다고 그의 앞에서 오만 방자하게 자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친정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도 역시 실권은 안동 김씨세력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세력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조선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5] 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 조에는 안동 김씨세력이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동학과 삼남지역의 민란

1862년 9월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서광리 사람 강제검(姜悌儉, ?~1863)과 제주 제주목 사람 김흥채(金興采, ?~1863)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한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 진주민란과 제주민란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실질적으로 거두는 향리와 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년 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강제검, 김흥채는 체포후 압송되어 처형된다.

 

최후

1862년부터 철종은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고, 누워있거나 의원의 어배진(임금의 진찰)을 보면서 겨우겨우 정무를 결재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아무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수로 천거된 북청군의 물장수는 "내가 북청 군수로 임명된 아무개이니 상감 마마님 잘 부탁합니다레."라고 말하여 조정이 소란해졌지만, 철종은 오히려 깎듯이 하지 않은 그 인사의 순진함을 보고 초심을 잃지 말라며 다독였다 한다. 이는 유주현이나 김동인의 시대에까지 전해져 유주현과 김동인의 소설에도 인용되었다. 원래 몸이 병약한데다가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했다.

그는 조정에서 연회를 볼 때나, 후궁, 기녀들과 만찬, 음주할 때에도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달려나가 슬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다. 이를 두고 매천 황현은 철종을 가리켜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 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가 일어날 가망이 없다고 본 흥선대원군이 무렵부터 자신의 서녀를 통해 사돈 이호준, 이호준의 정실 사위 조성하, 조성하의 종형제 조영하 등을 통해 암암리에 조대비와 은밀히 물밑 교섭을 시도하여 다음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1864년 1월 16일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창덕궁대조전(大造殿)에서 병으로 승하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그의 7촌 조카뻘이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 (훗날의 고종) 이 계승하였다. 철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실제 직계 남자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남연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종손으로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후

1862년 이후 자주 약방의 입진을 받던 철종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전대 왕이 후사 없이 사망했을 경우 후계자 지명권은 당연히 왕실의 웃어른께 돌아가는게 순서였기 때문에 이에 맞서서 안동 김씨 세력은 풍양 조씨 세력과 싸움을 벌여 서로 옥새를 차지하려 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미 신정왕후와 미리 은밀한 약조를 맺은 상태였다. 왕의 임종을 지켜본 신정왕후는 재빨리 어보(옥새)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한다. 그는 흥선군의 적자인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입적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로써 고종이 익성군으로 봉하고 조선의 제 26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묘호는 철종으로, 슬기롭고 명석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름뿐, 사실상 명종과 더불어 외세에 힘에 눌려 제대로 정치를 못했기 때문에 암군(暗君)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예릉이다.

1903년(고종 광무 7년)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에 의해 고향 생가가 중건하였다. 그의 생가는 대한민국에 와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그에게도 황제로 추존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나 1908년(융희 1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어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성격

공식 기록상 에서의 철종은 온화하고 검소한 성품을 지닌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예로 수라간에서 임금이 쓰는 은그릇이 실종된 적이 있었는데, 철종은 "가벼운 일을 갖고 관련자들을 처벌할 필요는 없다." 며 무마시켰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자,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라는 식으로 태연히 행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철종은 또한 궁중의 억압된 생활을 굉장히 힘들어 하였다고 전해진다. 철종은 안동김씨 새력에 밀려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따라서 온화한 모습과 검소한 성품은 단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이와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철종은 왕이 되기 이전에 서민 생활을 오래 해 왔기에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의 위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친정을 하고는 있으나 실권은 안동 김씨 세력이 쥐고 있었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철종은 소탈함과 검소함으로 라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노력했다는 주장이다. 현재 철종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역사적 자료가 다소 부족하기에 정확한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기타

철종이 후궁에게서 난 유일한 딸 영혜옹주노론가 출신 개화파 정치인 박영효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영혜옹주는 결혼 직후 사망했고, 후사가 없는 박영효는 고종의 배려로 궁녀 몇명을 첩으로 맞이한다. 그 중 한명인 범씨에게서 서자 2명을 얻게 된다. 한편 영혜옹주를 낳은 생모 역시 범씨였다.

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순조, 익종(문조), 헌종과 가장 촌수가 가까우면서(종법상 헌종과 7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종친이기 때문이다. 이는 양자를 들이는 데 있어 당시의 관습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이 모두 양자로 계보를 이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헌종과 11촌이 되며, 헌종 승하 당시 결혼하여 아들(이재면)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이하전은 족보상 헌종과 27촌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큰아들 이재면은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결혼 전인 둘째 이명복이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잇게 된다. 이 무렵부터 자신의 서녀를 통해 사돈 이호준, 이호준의 정실 사위 조성하, 조성하의 종형제 조영하 등을 통해 암암리에 조대비와 은밀히 물밑 교섭을 시도하여 다음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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