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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 농민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화전민이나 자유 노동자로 전락하다. 토지조사사업, 농민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화전민이나 자유 노동자로 전락하다. 조선 토지 조사 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조사 사업이다. 사업의 배경 한국의 토지 제도는 원칙적으로 국유제로서 각 관청이나 관리에게 준 사전도 토지의 수조권을 이양한 데 불과하며 경작권도 농민이 가지고 있어서 토지의 근대적인 소유 관계는 없었다. 따라서 수조권을 가진 지배 계급과 경작권의 소유자인 농민은 다같이 그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특히 토지가 공동체의 소유인 경우에는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자기의 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상호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일.. 더보기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李子春, 1315년 ~ 1361년 1월)은 원의 관료이자 고려의 무신이며 조선의 추존왕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몽골식 이름은 울루스부카(Ulus-Buqa, 한국 한자: 吾魚思不花 오어사불화)이다. 원나라의 천호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였다. 대중대부사복경과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성계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환조 연무성환대왕(桓祖 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생애 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 더보기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부인,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다.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부인,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다.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 文子 (かねこ ふみこ),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로, 한국의 독립 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이었다. 일본의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모두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에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더보기
박열, 흑도회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다. 박열, 흑도회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다. 박열(朴烈, 박렬,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학창시절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朴英洙)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상주시에 있던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수학했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 더보기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 더보기
여불위, '명성 있는 자'(聞, 즉 실속은 없으면서 소문만 번드르하게 난 인간) 여불위, '명성 있는 자'(聞, 즉 실속은 없으면서 소문만 번드르하게 난 인간)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는 중국의 전국 시대 진나라의 무관(武官)이며 승상이자 정치가이다. 불위는 상인 출신으로 출생지를 두고는 기록이 갈리는데 유향은 위(衛) 복양으로 사마천은 양적(陽翟)으로 기록했다. 불위는 여러 곳을 오가며 부를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행상인 출신으로 추측되며 이인을 만나기 전부터 천금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조(趙) 한단에서 장사를 하다가 진나라의 왕족으로 조나라의 볼모로 잡혀있던 이인(異人, 훗날 자초로 개명. 진의 장양왕으로 즉위)을 보고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만하다(此奇貨可居)"라 중얼거렸다. 이후 전국책의 기.. 더보기
오다노부나가의 성격, 잔혹성에 대한 평가 오다노부나가의 성격, 잔혹성에 대한 평가 오다 노부나가(일본어: 織田 信長 (おだ のぶなが),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는 일본의 전국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연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의 삼영걸로 불린다. 오와리 쿠니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전국 시대의 일본을 평정해, 하극상이 계속되던 전국 시대 끝에 최초의 천하인이 됐다. 그러나 .. 더보기
군함도,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해 하루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시키다. 군함도,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해 하루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시키다. 하시마 섬(일본어: 端島 (はしま))은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군칸지마(軍艦島 (ぐんかんじま),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곳이기도 하며 또한 1960년대까지 탄광 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폐산 이후 주민들이 이주하였으며, 섬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였으나, 한국의 반대로 지정에 난항을 겪었다. 그후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를 하겠다는 조건을 통해 간신히 등재하였으나, 직후 태도를 바꾸어 강제 노동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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