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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충혜왕,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다. 충혜왕,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다. 충혜왕(忠惠王, 1315년 2월 22일 (음력 1월 18일) ~ 1344년 1월 30일 (음력 1월 15일))은 고려 제28대 국왕(재위: 1330년 ~ 1332년, 복위 1339년 ~ 1344년)이다. 휘는 정(禎),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 한국 한자: 寶塔實里 보탑실리).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혜왕(忠惠王)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이다. 충숙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의 아들이다. 생애 충숙왕 17년(1330), 충숙왕이 원나라에게 폐위되자 즉위했지만, 충혜왕 2년(1332)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충숙왕이 복위되어 다시 원나라로 갔다. 충숙왕 복위 7년(1339)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사촌 심양왕.. 더보기
조준, 경제육전, 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다. 조준, 경제육전, 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다. 조준(趙浚, 1346년 ∼ 1405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생애 1371년(공민왕 21년) 음서로 문관 관직에 천거되었다가 1374년(공민왕 24년)에 함과에 급제, 공민왕 시대와 우왕 시대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384년.. 더보기
자제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다. 자제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다. 자제위(子弟衛)는 고려 공민왕이 1372년 설치하여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한 기관이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홍륜(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공민왕의 지시에 따라 공민왕의 후궁과 성관계를 맺게 했다는 조선측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조선왕조 개창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홍륜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여 임신시켰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 더보기
홍륜, 최만생을 비롯한 자제위가 모의하여 공민왕을 시해하다. 홍륜, 최만생을 비롯한 자제위가 모의하여 공민왕을 시해하다. 홍륜(洪倫, ? ~ 1374년)은 고려 후기의 인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홍언박의 손자이자 홍사우의 아들이다. 1372년에 설치된 자제위에 소속되어 공민왕을 보필하는 한편 공민왕이 후사를 보기 위해 자제위에 소속된 청년들을 비빈들과 사통시켰는데 홍륜 또한 공민왕의 셋째 부인인 덕풍군의 딸 익비 한씨와 관계를 맺었다. 이후 임신한 사실이 최만생에 의해 공민왕에게 알려지고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를 전부 죽일 것이라고 말하자 겁을 먹은 최만생이 홍륜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홍륜과 최만생을 비롯한 자제위가 모의하여 공민왕을 시해하였다. 이후 이인임에 의해 공민왕을 시해한 것이 발각되면서 처형당했다. 생애 본관은 남양 홍씨(南陽 洪氏) 공.. 더보기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林堅味, ? ~ 1388년 1월)는 고려 말의 무신이다. 공민왕 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 침입 때 나주도병마사(羅州道兵馬使)로서 왕을 호종(扈從)해 1등공신이 됐다. 고려말 빈번했던 외적의 침입 때마다 군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특히 1368년 원나라 수도가 명나라 군에 의해 포위되는 등 중국 왕조 교체기의 고려 안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시점에 안주 순무사를 맡았다.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이인임과 권문세족의 편에서 권세를 누리다가 1388년 이성계에 의해 제거됐다. 생애 고려의 무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林彦修)의 아들이다. 부친 임언수가 군.. 더보기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원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개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더보기
신돈, 전민변정도감,개혁자 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간신으로 인식되어 오다. 신돈, 전민변정도감,개혁자 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간신으로 인식되어 오다. 신돈(辛旽, 1322년 ~ 1371년 8월 21일 (음력 7월 11일))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자(字)는 요공(耀空), 호(號)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본관은 영산이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고 매골승(埋骨僧)과 떠돌이 승려로서 살았다.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을 만나 시국관(時局觀)이 왕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 더보기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李子春, 1315년 ~ 1361년 1월)은 원의 관료이자 고려의 무신이며 조선의 추존왕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몽골식 이름은 울루스부카(Ulus-Buqa, 한국 한자: 吾魚思不花 오어사불화)이다. 원나라의 천호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였다. 대중대부사복경과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성계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환조 연무성환대왕(桓祖 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생애 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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