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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 더보기
탕평책, 영조의 완론탕평, 정조의 준론탕평 탕평책, 영조의 완론탕평, 정조의 준론탕평 탕평책(蕩平策)은 조선 영조가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후대인 정조 대에도 이어졌다. 이름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 중 5조인 황극설(皇極設)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 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가장 첫 탕평의 언급은 숙종조의 언급인데, 박세채가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경종 때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영조부터 본격적인 탕평이 들어섰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인물들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정조 대에 이르러 성과를 거둔다.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기도 했.. 더보기
전봉준공초,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 전봉준공초,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는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 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 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더보기
삼국유사, 일연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록 삼국유사, 일연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록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의 승려인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 삼국유사에는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 가야)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密敎)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 더보기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15년 4월 25일)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박제가 1778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9년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 .. 더보기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奎章閣)은 조선 후기의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이다.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 (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 연혁 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 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규장각은 .. 더보기
창덕궁 돈화문, 궐내각사,규장각,옥당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은 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문종 때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고 연산군 때 크고 높게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습니다. 창덕궁이 차츰 이궁에서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자 정문을 보다 크고 위엄있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거라는 풀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궁궐의 정문이 3칸인데 비해 돈화문은 5칸이고 이층으로 크고 높게 지어졌습니다. 경복궁과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에 있는 것과는 달리 창덕궁의 돈화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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