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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사료를 보면 당대사람들이 원균이 용장이라고 주장하나 아군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며 외적만 보면 도주하 는 장수가 용장이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조정에 목을 보내는데 집착하고 공을 세우는데 욕심을 냈다 는 사료를 참고해보면 사실은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실록 기록들 경상 우수사(慶.. 더보기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 또는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전선은 333척)을 물리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 더보기
이순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 묘사, 십경도 십경도 소년시절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 사후 조카 이분이 쓴「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로 보아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순신의 어린시절 전쟁놀이를 하며 동무들을 이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청년시절 머리가 나쁘다고 탓하지마라. 이순신은 혼인 후, 장인 방진의 영향으로 무관이 되어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28세가 되던 해(157.. 더보기
난중일기, 친필일기 난중일기 난중일기, 친필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 해군사령관이 1592년 1월1일 부터 1598면 11월17일 까지 군중 생활을 직접 기록한 친필일기입니다. 임진왜란 발발(1592년 1월) 이후부터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의 기간을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는 원래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595년의 을미일기를 뺀 총7책이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일기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임진왜란은 외형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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