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흥선대원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그의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 및 정리를 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 더보기
명성황후, 평가와 비판, 당시 생존의혹,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명성황후, 평가와 비판, 당시 생존의혹,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 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 더보기
순종, 융희제, 기유각서 사건으로 허수아비 군주가 되다. 순종, 융희제, 기유각서 사건으로 허수아비 군주가 되다.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6일)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혈통은 사실상 조선에서 유래하므로, 역사성의 편의상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조선의 제27대 왕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 성은 이(李), 휘는 척(坧)이다. 특징 상기한 바와 같이 그는 부황 고종과는 달리 조선 왕의 신분으로 재위한 기간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제27대 왕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대한제국 황제 치세 시절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1907년부터 1910년까지 3년 재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력 성은 이(李),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 더보기
위안스카이,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다. 위안스카이,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다. 위안스카이(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는 중국 허난 성 쉬창 부 샹청 현 출신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중화제국의 황제이다. 그의 자(字)는 웨이팅(중국어 정체: 慰庭, 병음: wèi tíng)이며 호(號)는 룽안(중국어 정체: 容庵, 병음: róng ān)이다.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광서제를 대신함으로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주하여 귀국하여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 더보기
순헌황귀비 엄씨,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다. 순헌황귀비 엄씨,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2월 2일/음력 1월 5일 ~ 1911년 7월 20일)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비로 책봉되었다. 8세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순비가 되었다가 1903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옳지 않은 칭호이다. 본관은 영월이며 1854년 1월 5일 서울에서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 더보기
갑신정변, '3일 천하', 개화파가 민중에 뿌리내리지 못하다. 갑신정변, '3일 천하', 개화파가 민중에 뿌리내리지 못하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쿠데타)이다. 진압 후, 갑신난,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12월 4일 저녁의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내외와 왕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더보기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 더보기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담 하나를 경계로 대한제국을 보는 듯 하다.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는 천장산(天藏山)은 하늘이 감추었다는 이름이며, 한양의 주산 북악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조선황실의 땅이었다. 천장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1897 - 1919)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고종황제)의 황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와 의민황태자의 맏아들이자 엄귀비의 손자인 이진(1921~1922)이 모셔져 있다. 번잡한 청량리동에서 담 하나를 경계로 숲이 우거진 아담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을 보는 듯 그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영휘원 엄귀비는 조선 철종 5년(1854) 11월에 평민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나 5살에 아기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받아 그를 모시..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