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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2)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영의정 최후, 사후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남인을 형성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 (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 더보기
병산서원,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다. 병산서원,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사적 제260호로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 선조5년 서애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개요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풍산현에서 1572년 선조 5년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 서부터 병산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 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 광해군 12.. 더보기
한국의 역사 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 마을 : 하회와 양동 한국의 역사마을에는 씨족마을, 읍성마을 등의 다양한 유형이 있으나 그 중에서 씨족마을은 전체 역사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유형이다. 한국의 씨족마을은 조선시대(1392~1910) 초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를 점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씨족은 성씨와 본관을 같이 하는 부계혈연집단, 즉 조상을 같이 하는 동성동본인들과 다른 혈연 집단에서 배우자로 들어온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을 말한다. 씨족마을은 하나 혹은 소수의 씨족이 전체 주민구성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마을의 의사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마을을 일컫는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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