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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 숭덕제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다. 홍타이지, 숭덕제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다.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후금의 제2대 칸이자, 청나라의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이다. 휘는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한국 한자: 愛新覺羅皇太極 애신각라황태극).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부황인 천명제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연호를 천총(天聰)이라 하다가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도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이다.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연호를 두 번 쓴 황제이기도 하다.(선통제는 연호를 대동, 강덕 3개나 쓴 적이 있지만, 대동과 강덕은 만주국에서 쓴 연호로, 청나라에서 쓴 연호는 선통이 유일하다.) 생애 초반 1.. 더보기
김상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펴고,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다. 김상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펴고,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다.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신)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생애 초반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으며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더보기
최명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과 맞서다. 최명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과 맞서다. 최명길(崔鳴吉, 1586년 ~ 1647년 6월 19일(음력 5월 17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양명학자, 외교관, 정치가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에 봉작되었다가 완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605년 생원시에 입격한후 그해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14년 병조좌랑에서 삭직된 뒤 복권되었으나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하여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군되었다. .. 더보기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능호 : 영릉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조성시기 : 1673년(현종 14)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 더보기
장릉 인조의 능,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다. 장릉 인조의 능,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다. 위치 :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능의 형식 : 합장릉 능의 조성 : 1636년(인조 14), 1649년(효종즉위), 1731년(영조 7) 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이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특히 옛 장릉의 석물과 천장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금천교,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변로를 깔았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 더보기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임금이다.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5년 대군사부로 임명된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 등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1637년 정축하성 이후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그 뒤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부왕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년부터는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 더보기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왕조실록 전부를 전산화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왕조실록 전부를 전산화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별칭은 《조선실록》이다.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 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다. 《.. 더보기
최진립 , 험천전투에서 칠순에 가까운 노장 최진립 전사하다. 최진립 , 험천전투에서 칠순에 가까운 노장 최진립 전사하다. 최진립(崔震立, 1568년 ~ 1636년)은 조선의 무신이다.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68년 경주에서 최신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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