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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15년(1689년)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경과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 더보기
현종,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하다. 현종,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하다. 현종(顯宗, 1641년 3월 14일 (음력 2월 4일) ~ 1674년 9월 17일 (음력 8월 18일), 재위: 1659년 ~ 1674년)은 조선의 제18대 임금이다. 시호는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현종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顯宗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다. 휘는 李棩(이연),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경직(景直). 효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이다. 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 명성왕후이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한 왕이고 왕비 외의 후궁을 1명도 두지 않은 검소하고 소박한 조선의 왕이기도 하다.. 더보기
송시열,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다. 송시열,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다.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더보기
최립, 선조 때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이다. 최립, 선조 때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이다. 최립(崔岦, 1539년 ~ 1612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 겸 문신이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본관은 통천(通川). 율곡 이이 등과 함께 선조 때의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로,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과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수옹 송갑조는 그의 문인이었다.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유년기 1539년(중종34)개성에서 부친인 진사 최자양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8대조는 조선초의 명장인 최운해이고, 5대조 최로는 명필로 알려졌고, 절충상호군으로 단종 충신단에 배향된 인물이다. 최립은 붓을 잡을 만한 .. 더보기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민회빈 강씨(한자: 愍懷嬪 姜氏, 1611년 ~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 더보기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사료를 보면 당대사람들이 원균이 용장이라고 주장하나 아군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며 외적만 보면 도주하 는 장수가 용장이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조정에 목을 보내는데 집착하고 공을 세우는데 욕심을 냈다 는 사료를 참고해보면 사실은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실록 기록들 경상 우수사(慶.. 더보기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박세당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한국에는 고려말에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윤선도, 윤휴, 허목, 윤증,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곤욕을 당했다. 개요 본래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사이비 학문으로 궤변을 펼치는 변설가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고려말기 성리학이 도입될 때부터 나타나 존재하였으나 주로 활용된 것은 조선중기,.. 더보기
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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