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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구, 영친왕과 이방자의 둘째 아들 이구, 영친왕과 이방자의 둘째 아들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2005년 7월 16일)는 대한민국의 건축가, 공학자, 교육자, 사업가이다. 구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의 둘째 아들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으며, 신적강하로 이왕세자직을 상실하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한때 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대한민국에 귀국,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생전에 건축사와 대학강사 등으로 활동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한때 귀국하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먼 일족인 이승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군사 정권 박정희 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사.. 더보기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9.28사건, 부통령 장면이 서울 시공관에서 김상붕의 총에 피격되다.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9.28사건, 부통령 장면이 서울 시공관에서 김상붕의 총에 피격되다. 9·28 사건 또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은 1956년 9월 28일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 장면(張勉)이 서울 시공관에서 김상붕 등의 총에 피격된 사건이다.,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연단에서 연설을 마치고 하단하던 중 복도에서 쏜 최훈, 김상붕 등 5인이 쏜 총에 왼손을 관통당하였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으나 장면은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왼쪽손 관통상을 당하였으며, 저격범 김상붕 등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고 도주하였다. 저격범들은 바로 현장 근처에서 체포되고 피격 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된 최훈은 10월 1일 구속되었다. 당시 저격범들이 현장에서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친 .. 더보기
3.15 마산시위,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다. 3.15 마산시위,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다. 3·15 마산시위(三一五馬山示威)는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며,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롭게 거사를 했다는 뜻에서 3·15 의거라고 부르기도 한다. 3·15 마산시위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 개요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 더보기
조소앙의 광복군 창설과 외교활동, 삼균주의를 창시하다. 조소앙의 광복군 창설과 외교활동, 삼균주의를 창시하다. 임시정부 조직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4월 10일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성부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정도령에 손병희, 부도령 및 내각총리경에 이승만을 임명해서 내각을 구성할 때 조소앙은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혁명당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초대 임시 의정원 의원(지역구 경기도 대표)으로 선출됐다.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회되고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될때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대한.. 더보기
조소앙,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해 2.8독립선언을 기획하다. 조소앙,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해 2.8독립선언을 기획하다. 조소앙(趙素昻, 1887년 4월 30일 ~ 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그는 일본 유학 중 무오독립선언서의 기초에 참여하였고, 1919년 이후 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줄곧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바로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50.. 더보기
박흥식,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과 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폭리를 취하다. 박흥식,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과 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폭리를 취하다. 박흥식(朴興植, 1903년 8월 6일 ~ 1994년 5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광복 이후에는 사업에서 손을 떼었지만 1950년부터 1980년까지 30년동안은 다시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제1공화국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첫 번째로 체포된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초기 평안남도 용강군(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특별시 룡강군) 출신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십대 중반의 나이에 인근의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한 뒤 인쇄업, 지물업 등으로 사업이 계속 번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26년 경성부로 올라와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 더보기
노덕술,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6.6반민특위습격사건으로 풀려나다. 노덕술,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6.6반민특위습격사건으로 풀려나다. 노덕술(盧德述, 일본명: 松浦 鴻 (まつうら ひろ) 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이다. 그의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일제강점기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 더보기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가이며 시인이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삼각산로 5)에 안장되어 있다.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신으로, 본관(本館)은 울산(蔚山)이다. 조선 말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金相熹)의 아들이며,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5대손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며, 일제 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악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조선국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한국..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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