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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효릉 인종의 묘,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하다. 효릉 인종의 묘,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하다.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능의 형식 : 쌍릉 능의 조성 : 1545년(명종 즉위), 1578년(선조 11) 능의 구성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인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1578년(선조 11)에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병풍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인성왕후의 능침은.. 더보기
김육, 공물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다. 김육, 공물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다.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더보기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 생애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더보기
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기묘사화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 더보기
조광조의 개혁정치, 위훈삭제, 중종과의 갈등 조광조의 개혁정치, 위훈삭제, 중종과의 갈등 관료 활동 그해 바로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된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그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놓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전적을 거쳐 .. 더보기
김굉필,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 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더보기
조광조, 중종은 조광조의 시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다. 조광조, 중종은 조광조의 시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다.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 더보기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서경덕(徐敬德, 1489년 음력 2월 17일 ~ 1546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부친은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다.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그를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 스승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도 유명하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평생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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