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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봉석주, 불법과 탐욕을 자행하여 대간으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다. 봉석주, 불법과 탐욕을 자행하여 대간으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다. 봉석주(奉石柱, ? - 1465년 4월 19일)는 조선 전기의 무신이자 장군, 정치인이며, 계유정난과 세조 찬위에 공을 세운 공신이다. 본관은 하음(河陰)이며, 자는 군보(君輔), 호는 서관(墅觀)이다. 사육신 중 한사람인 박팽년의 형수 해평 윤씨를 노비로 삼았다가 곧 첩으로 삼았다. 정난공신 2등으로 녹훈되어 강성군(江城君)에 봉작되었고,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충청북도 출신. 초기 활동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442년 6월 부사정(副司正)으로 재직 중, 주서(注書) 권효량(權孝良)와 함께 관기 패강아(浿江兒)와 관계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신 오양(吳良)이 관계한 여기(女妓)라 하여 의금부의 탄핵을 받고 장 80대.. 더보기
한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다. 한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다. 한확(韓確, 1400년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부인 정선군부의 친정아버지이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더보기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12월 28일 ~ 1478년 11월 26일)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 더보기
이징옥의 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발로 군사를 일으키다. 이징옥의 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발로 군사를 일으키다. 이징옥의 난(李澄玉-亂)은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수양대군 일파의 권력 장악과 자신의 파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여진족 등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다. 1453년(단종 1년) 이징옥이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부터 파직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여진에 도움을 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러나 정종(鄭種), 이행검 등의 습격으로 이징옥이 살해되어 실패로 끝났다. 후일 채제공은 그가 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는 아니라고 하였으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발로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개설 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 김종서 등의 부장으로 출정,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경원절제사·.. 더보기
세조찬위,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중종 반정과 인조 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치다. 세조찬위,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중종 반정과 인조 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치다. 세조찬위(世祖簒位) 또는 세조반정(世祖反正)은 조선의 첫 번째 반정으로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일이다. 1455년(단종 3)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이 김종서 일파와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뒤 왕숙인 수양대군(세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관점에 따라서 단종 폐위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배경 세종과 문종의 사후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관료들과 외척들이 발호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숙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이 두각을 드러냈으며, 계유정난을 빌미로 반정의 명분을 삼았다.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나이 겨우 12세에 불과하여, 부왕이자 선왕인.. 더보기
남이 장군,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다. 남이 장군,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다. 남이(南怡, 1441년 ~ 1468년 10월 27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장군, 정치인, 시인, 척신이다.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고, 할머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 이며, 부인은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본관은 의령이다. 무예에 능하였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20대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해임당한 것에 불만을 품던 중 그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문제삼은 유자광(柳子光)과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의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순조 때인 1818년(순조 18년)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초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부사를 지낸 남재(南在)의 현손으.. 더보기
예종,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승하하다. 예종,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승하하다. 예종(睿宗, 1450년 1월 14일(음력 1월 1일) ~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재위 1468년~1469년)은 조선의 제8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황(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시호는 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세종의 차남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치세 1468년 9월부터 이듬해 1469년 12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468년 9월부터 1469년 1월까지 사촌 형이자 손아랫동서인 영의정(領議政) 귀성군 이준(龜城君 李浚)이 섭정하였으며 1469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 승하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예종은 1450년 경오년 정월 정축.. 더보기
성종, 조선의 태평성대와 그 이면, 평가와 비판 성종,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하다. 즉위 이후 수렴 청정 기간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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