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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돈(焞),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보(明譜),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부터 172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부터 1717년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부터 1720년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숙종은 역대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 더보기
소수서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다. 소수서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 서원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 땅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에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 앞에 향교 .. 더보기
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李元翼, 1547년 ~ 1634년)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 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 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 더보기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박세당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한국에는 고려말에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윤선도, 윤휴, 허목, 윤증,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곤욕을 당했다. 개요 본래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사이비 학문으로 궤변을 펼치는 변설가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고려말기 성리학이 도입될 때부터 나타나 존재하였으나 주로 활용된 것은 조선중기,.. 더보기
경신환국, 삼복의 변,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다. 경신환국, 삼복의 변,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하다.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이다. 경신사화(庚申士禍), 경신출척 ​(庚申黜陟)이라고도 한다. 개요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허견의 아버지 허적 유악 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 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 용품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한 것이다.(허견의 옥사) 허적의 .. 더보기
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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