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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나라,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 ‘쇼군(将軍)’

무사의 나라,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 ‘쇼군(将軍)’일본 역사에서 '쇼군(将軍)'은 단순한 군사 직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통치한 실질적 최고 권력자의 이름이었다. 겉으로는 천황이 존재했지만, 백성과 영주는 쇼군의 명령에 따랐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움직이는 손은 언제나 칼을 든 무사였던 것이다.쇼군의 기원 –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쇼군’은 본래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의 줄임말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라는 뜻이다. 일본 정부가 동북 지방의 아이누족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할 때, 임시로 무장 지휘관에게 부여한 칭호였다.그러나 12세기 말, 이 타이틀은 일본의 정치 권력 중심으로 변모한다. 1192년, 무사 출신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일본 최..

역사보기 2025.05.05

옥포해전 –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이순신의 전설이 시작되다

옥포해전 – 조선 수군의 첫 승리, 이순신의 전설이 시작되다전투 날짜 및 장소날짜: 1592년 5월 7일 (음력 4월 28일)장소: 경상남도 거제도 옥포항배경 및 전략 상황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보름 남짓 지난 시점, 일본군은 부산포 상륙 후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잇따라 패배하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교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군 정비를 마친 직후였다.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맞붙은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함선을 기습하였다. 이는 조선 수군의 첫 반격이자 일본군에게는 처음으로 당하는 해상 패배였다.전투의 전개조선 수군은 약 ..

역사보기 2025.05.04

조선 후기, 노비는 어떻게 해방되었을까?

조선 후기, 노비는 어떻게 해방되었을까?조선 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그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는 노비 제도의 붕괴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노비는 점차 해방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제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과정을 따라가 본다.조선의 노비는 누구였는가?조선의 노비는 크게 공노비(官奴婢)와 사노비(私奴婢)로 나뉘었다.공노비는 국가나 관청의 소속으로, 주로 행정 업무나 궂은일을 맡았다.사노비는 양반 등 개인에게 속한 존재로, 가사 노동, 농업, 수공업 등에 동원되었다.노비는 법적으로 재산처럼 취급되었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이나 거주 이전조차 할 ..

역사보기 2025.05.04

심 스와핑 방지 및 대응 방법

최근 SK텔레콤의 시스템 해킹으로 인해 고객의 유심(USIM) 관련 정보가 유출되면서, '심 스와핑(SIM Swapping)' 공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가상자산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보안 강화 조치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심 스와핑(SIM Swapping)이란?심 스와핑은 해커가 피해자의 개인정보(예: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를 이용해 통신사로부터 유심을 재발급받거나 복제하여, 피해자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기기에 연결하는 수법입니다. 이를 통해 해커는 피해자의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가로채며, 2단계 인증(2FA) 등을 우회하여 금융 계정에 접근하거나 가상자산을 탈취할 수 있습니다 .최근 SKT 유심 정보 유출 사건2025년 4월, SK텔레콤의 내부 시스템이 해킹되어 일부 고..

정보보기 2025.05.03

조선의 노비, 이름 없는 삶의 기록

조선의 노비, 이름 없는 삶의 기록– 신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조선의 거리를 걷다 보면, 늘 조용히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양반가의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오가던 사람들,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의 식사를 준비하던 손길, 들판을 일구고 관청의 일을 도맡았던 이들. 그들은 조선의 노비(奴婢)였다.노비는 조선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층, 곧 천민(賤民)의 중심을 이루는 계급이었다.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고, 이 제도 속에서 노비는 단순히 하층민이 아니라 법적, 제도적으로 규정된 존재였다. 그들은 개인이나 국가에 속했고, 노동의 대가 없이 복무했으며, 출생부터 생애까지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조선 사회에서 ‘노비’란 누구인가노비는 흔히 조선 시대의 ‘하인’이나 ‘머슴’ 정도..

역사보기 2025.05.03

바다의 주인이 돌아오다 –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부활

바다의 주인이 돌아오다 –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부활1593년 초, 조선은 평양과 한양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왜군은 여전히 남부 지역을 장악한 채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가운데 진정한 희망은 바다에서 피어난다. 전란 초기부터 줄곧 승리를 거두며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다시금 부활하면서, 전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하였다.수군의 절망 – 부활을 향한 시련임진왜란 발발 직후, 조선의 수군은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1592년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당포, 한산도 대첩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한산도 대첩(1592년 7월)**은 일본 수군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승리였다. 이후 왜군은 바다를 장악하지 못하고 ..

역사보기 2025.05.02

파기환송이란 무엇인가 – 판결이 뒤집히는 순간

파기환송이란 무엇인가 – 판결이 뒤집히는 순간“이 사건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한다.”뉴스에서 종종 마주치는 대법원의 판결문 문장이다. 이미 재판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다시 돌아가 새로 시작된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도대체 파기환송이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법원이 내린 판결이 뒤집히는 과정, 그 중심에 있는 ‘파기환송’이라는 제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법원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먼저 우리나라의 법원 구조를 간단히 짚어보자. 일반 형사나 민사사건은 보통 다음과 같은 3심제를 따른다.1심 – 사건을 처음 다루는 법원 (지방법원 등)2심 –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을 때 다시 심리하는 법원 (고등법원 등)3심(대법원) – 법률심. 사실관계를 다시..

정보보기 2025.05.01

어둠 속의 불꽃 – 평양 탈환과 한양 수복, 조선 반격의 시작

어둠 속의 불꽃 – 평양 탈환과 한양 수복, 조선 반격의 시작1592년 6월, 조선은 국토 대부분이 왜군에게 장악당한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바다 승전, 의병의 산발적인 항전,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 결정은 조선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희망은 드디어 평양 탈환과 한양 수복이라는 반격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명군의 참전 – 진정한 ‘연합군’의 시작명나라 조정은 조선의 요청과 일본의 명 정벌 야욕을 확인한 후,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도로 초기 3천 명의 정예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군대는 요동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하였으며, 1592년 말 평양 근처에 도착하였다.명군은 이들의 전술과 화포 능력을 믿고 자만하였으며, 조선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역사보기 2025.05.01

선조의 몽진, 조선 조정 반격을 준비하다.

선조의 몽진과 무너진 백성의 마음1592년 5월 2일, 조선의 수도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당했다. 경상도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군대를 궤멸시킨 후, 거의 무저항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의주로 몽진했고, 조정은 붕괴되다시피 했다.1592년 5월 2일, 한양은 불에 타지도, 성벽이 무너지지도 않은 채 왜군의 손에 넘어갔다. 임진왜란 개전 불과 열흘 만이었다. 수도를 지키기 위한 전략은 무너졌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를 ‘몽진(蒙塵)’이라 부른다. 먼지 속을 걷는다는 뜻으로, 왕이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수도를 떠나는 참담한 상황을 이른다.몰락하는 조정, 준비 없는 피난한양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은 분명히 있었..

역사보기 2025.04.30

충주 탄금대 전투 – 조선 최후의 기병, 강물에 잠들다

탄금대 – 신립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충돌1592년 4월 28일, 임진왜란 발발 15일 만에 조선의 허리가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날, 충주의 남한강 절벽 위 탄금대에서는 장군 신립이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일전을 벌였다. 조선과 왜군의 전략, 무기, 기세가 교차한 이 전투는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이 전투는 단순한 전투 패배가 아니라, 조선군 전략과 조직이 근본적으로 무너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불꽃처럼 살다 간 무장, 신립신립(申砬)은 무인 가문 출신으로, 선조 대에 급부상한 무장이었다. 북방 여진족을 토벌하며 전공을 세운 그는, 기병 지휘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조는 상주 전투에서 패한 이일의 뒤를 잇는 인물로 신립을 선택하였다. 그의 어깨 위에는 조선의 중부 ..

역사보기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