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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흥안군 이제,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지만 일주일 만에 사형당하다. 흥안군 이제,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지만 일주일 만에 사형당하다.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瑅, 1598년 ~ 1624년 음력 2월 21일)는 조선 중기의 왕자이자 왕족 종실이다. 선조의 열번째 아들이자 온빈 한씨의 첫째아들이다.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어 임시 군주가 되었으나, 반란이 일주일만에 진압되면서 사형당하였다. 일생 휘는 제(瑅),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선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덕흥대원군의 손자이자, 임해군, 광해군, 정원군의 이복 동생이다. 이괄의 난 당시 부원수 이괄의 추대로 1624년 음력 2월 11일부터 7일간 임시로 왕위에 올랐으나 3일만에 이괄군이 패배하면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고종 때 복권되었다. 부인으로는 청주군부인 한씨(淸州郡夫人 韓氏)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 더보기
사릉 광해군의 묘,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다. 사릉 광해군의 묘,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다.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 묘의 형식 : 쌍분 묘의 조성 : 1623년(인조 1), 1641년(인조 19) 묘의 구성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왕자 묘제의 예로 조성되었다. 쌍분의 형태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광해군묘, 오른쪽이 문성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있다. 묘의 역사 1623년(인조 1)에 문성군부인 류씨가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음력 윤10월 29일에 양주 적.. 더보기
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4월 2일 ~ 1559년 6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이며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이초(李岹), 자는 경앙(景仰), 아명(兒名)은 이환수(李歡壽)이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사친(私親)으로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당시 적서를 가리던 그 시대에, 중종 임금의 서자였고, 선조는 서얼 콤플렉스와 방계승통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순조 때 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王子君)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결국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더보기
명종,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키다. 명종,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키다. 명종(明宗, 1534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1567년 8월 2일 (음력 6월 28일))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환(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양(對陽). 사후 시호는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중종의 차남으로 문정왕후의 유일한 친아들이다. 이복 형 인종(부왕 중종의 적장자)이 후사 없이 붕어하기 3일 전 인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로 모후인 문정왕후의 섭정, 친정 이후에는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윤백원, 이량, 심연원, 심통원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더보기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 더보기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그 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 더보기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3)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명(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로 명(明)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명(明)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설서(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명(明)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검열(檢閱).. 더보기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2)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영의정 최후, 사후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남인을 형성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 (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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