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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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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다.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 1920년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한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국경을 여러 번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크게 타격하였다.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하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할 음모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馬賊)을 사주하여 혼춘현[琿春縣]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즉, 일본군은 중국 마적 두목 창장하오[長江好]라와 내통해 훈춘 공격을 사주하여 그해 10월 2일 마적 400여 명이 훈춘성을 공격하였다. 마적단은 약속대로 오전 9시부터 4시간 살인과 약탈을 자행,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일본인 수 명을 살해하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질렀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중이나 중·소 국경 지대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패하자 이에 보복으로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전 주민 30여 호가 살해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수효와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효를 합하면, 추정하건대 피해한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르고 일본은 노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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