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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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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

 

관우(?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운장(雲長)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의제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민간전설(民間傳說)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 초반

관우가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관우가 현상수배당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보호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책임지여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장비와 같이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공손찬(公孫瓚)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 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

200년 유비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은 단지 300여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는데 노숙이 추가로 증원해준 천여명의 병력을 더하여 강을 사이로 관우와 대치하였다. 이에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였고,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그 사이 손권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내고, 여몽이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때 관우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우금을 생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우금의 부하들이 먹어치우는 군량 때문에 관우의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關平), 사마 조루과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에서 동탁과 전투를 벌일때 유비의 휘하에 있던 관우는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술이 식기전에 화웅(華雄)을 죽였다. 이후 호뢰관에서 유비,장비와 함께 여포를 상대하여 활약을 이어간다. 이후 관우는 관해의 침략을 받은 공융을 구해달라는 태사자의 요청에 유비와 함께 참전, 관해를 죽이고 북해를 구한다.

조조유비가 허도에서 사냥을 나갔을때 헌제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관우는 분노하여 조조를 죽이고자 했으나 유비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한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를 맡아 지킨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원소에게로 달아났고,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을 지키기 위해 조조에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세가지 조건을 내건 후 항복한다. 이후 조조를 위해 원소군의 안량(顔良), 문추(文醜)를 죽이는 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조조군의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하는데 이 장면은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 불린다.

유비손권조조에 맞서 연합군을 형성했을때 관우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유비가 형주를 평정할때 관우는 장사를 공격하여 태수 한현 수하에 있던 황충과 맞서 싸운다. 이후 위연의 도움으로 장사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관우는 유비가 촉을 공격하는 동안 형주를 맡아 지키게 된다.

유비가 한중을 취하자 군사를 일으켜 번성의 조인을 공격하였고, 조인을 구원하러 온 우금(于禁)과 방덕(龐德)을 장맛비를 이용한 수공으로 생포한다.

방덕과의 대결에서 방덕이 쏜 활에 맞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명의 화타(華陀)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둔다. 이후, 손권군의 여몽의 급습에 의해 본거지인 형주를 빼앗기고 심리전에 의해 군사가 와해되어 맥성(麥城)으로 후퇴한 관우는 요화(寥化)를 상용(止庸)의 유봉(劉封)과 맹달(孟澾)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이후 동오의 제갈근(諸葛瑾)이 찾아온다. 제갈근은 손권에게 항복하여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이를 뿌리친다. 이후 관우는 조루(趙累)의 건의에 따라 북문의 포위를 뚫고 익주(益州)로 가기로 한다. 그날 밤, 관우는 양자 관평(關平),조루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곳곳에 매복된 오군의 공격을 받아 조루는 난전 중에 죽는다. 그 후,관우는 미리 매복하고 있던 반장의 부하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히고 뒤따르던 관평 또한 반장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손권에게 끌려가 항복을 권유받으나 "옥은 깰 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수 없고, 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라고 하며 죽기를 원하였고 결국 관우와 관평은 참수된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는다. 손권은 관우를 벤 것에 대한 유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청룡언월도와 적토마

키가 9척(약 2m7cm), 수염 길이가 2자(약 46 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 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며 검과 창은 가벼울수록 위력이 좋다. 서양의 투 핸드 소드조차 저렇게 무식하게 만들지 않으며 서양의 도검 중 제일 무거운 도검은 실전에서 쓰는 칼이 아니라 사형을 집행할 때 쓰는 참수검이다.

정사 삼국지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寵愛)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陶山, 오나라 회계군 지역의 명산)의 철(鐵)을 캐서 칼 두 자루(쌍도)를 만들고 (거기에) '만인적 (萬人敵)' 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 도홍경(陶弘景),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

 

삼국지연의에는 조조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무예

관우의 무예는 당대에도 최강의 수준이어서, 삼국지 정사를 살펴보면 관우의 무용에 대한 당대의 평가들은 정사속에서도 최상급의 수식어로 표현된다.

삼국지 정사 저자 진수와 조조군의 참모였던 곽가, 정욱 등은 관우를 장비와 더불어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라 평하였고, 주유나 유엽 같은 당대 명사들 역시 그의 남다른 용맹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실제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 정사에서는 삼국지 연의와는 달리 장수들 간의 일대일 대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관우가 안량을 무찌른 싸움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 《삼국지》, 〈촉서 관우전〉

 

숭배 대상이 된 관우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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