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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흥안군 이제,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지만 일주일 만에 사형당하다. 흥안군 이제,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지만 일주일 만에 사형당하다.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瑅, 1598년 ~ 1624년 음력 2월 21일)는 조선 중기의 왕자이자 왕족 종실이다. 선조의 열번째 아들이자 온빈 한씨의 첫째아들이다. 이괄의 난 당시 추대되어 임시 군주가 되었으나, 반란이 일주일만에 진압되면서 사형당하였다. 일생 휘는 제(瑅),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선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덕흥대원군의 손자이자, 임해군, 광해군, 정원군의 이복 동생이다. 이괄의 난 당시 부원수 이괄의 추대로 1624년 음력 2월 11일부터 7일간 임시로 왕위에 올랐으나 3일만에 이괄군이 패배하면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고종 때 복권되었다. 부인으로는 청주군부인 한씨(淸州郡夫人 韓氏)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 더보기
강홍립, 광해군 때 조명연합군을 구성하여 요동에 파견되다. 강홍립, 광해군 때 조명연합군을 구성하여 요동에 파견되다. 강홍립(姜弘立, 1560년 ~ 1627년)은 조선의 문관, 군인이다. 광해군 때 명나라에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청나라와의 교전을 피하다가 투항했다.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생애 초기 1597년(선조 30년) 문과 알성시에 병과1등위로 급제하였고,설서,검열을 역임하고 1599년 함경도 도사, 1601년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1602년 장령, 수찬 1604년 교리, 부수찬, 사예, 1605년(선조 38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1606년 예조정랑, 부교리, 1607년 성균관 직강, 내자시정, 수찬을 지냈다. 관료 생활 광해군 원년 1608.. 더보기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 더보기
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5) 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 몰락과 죽음 (탄핵과 사형) 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 더보기
허균, 사상과 활동 (4) 허균, 사상과 활동 중국 방문과 넌설헌 문집 편찬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의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명의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더보기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3)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명(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로 명(明)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명(明)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설서(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명(明)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검열(檢閱).. 더보기
창덕궁, 선정전,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다. 창덕궁, 선정전,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 인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 이다. 이처럼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 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 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선정전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지금의 선정전(宣政殿)은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 더보기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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