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두환

부림사건, 학림사건,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 부림사건, 학림사건,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 부림 사건(釜林事件)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다. '학림'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을 따왔다.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고 수사 검사는 고영주였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사건 개요 이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고문.. 더보기
서석준, 부총리로 취임한 지 3개월만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국하다. 서석준, 부총리로 취임한 지 3개월만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국하다. 서석준(徐錫俊, 1938년 ~ 1983년, 경북, 성주)은 대한민국의 관료·행정인이다. 1962년 3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이 되고 1980년 경제기획원 차관, 상공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으로 사망했다. 생애 성주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2년간 AID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해인 1959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1962년 3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관료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주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1967년 물가정책과장, 1969년.. 더보기
장세동,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운동권의 비판과 함께 한편으론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도 있다. 장세동,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운동권의 비판과 함께 한편으론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도 있다. 장세동(張世東, 1936년 9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전라남도 고흥 출생이다. 호는 남촌(南村)이다.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였다. 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더보기
박희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해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고 석방되다. 박희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해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고 석방되다. 박희도(朴熙道, 1934년 7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연구인, 국영기업가, 사회운동가, 사회기관단체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아호는 효암(曉岩)이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2기 졸업생이다. 육사 생도 시절부터 박준병, 박세직과 함께 일명 쓰리박을 형성하며 육사 12기의 선두주자로 성장하여 왔다. 그 뒤 군단장,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으나 노태우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고 이후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96년 12·12 군사 반란이 문민 정부에 의하여 사법처리가 확실시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7년 12월 22일 12·12 군사 반란 가담자가 사면된 뒤 한국과 미국의 범죄인 인도협정이 발효될 .. 더보기
하나회, 12.12군사반란, 5.17쿠테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하다. 하나회, 12.12군사반란, 5.17쿠테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하다. 하나회 혹은 신군부(新軍部)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군사 조직이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를 내려오면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하였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했으며,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핵심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창설 초기 1951년, 4년제 육군 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더보기
K 공작계획,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 K 공작계획,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 K-공작계획은 1980년 3월 당시 보안사 언론반장 이상재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이라는 목적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실행한 언론 회유 공작 계획이다. 이는 신군부의 집권 과정 도중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으로 활용됐다. 배경 신군부는 80년 초부터 집권을 위해 언론을 활용할 계획을 구상했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1일경부터 보안사에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했다. 1980년 3월에는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그 .. 더보기
삼청교육대,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삼청교육대,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조종·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을 뜻한다. 대상자에는 학생과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체 피검자의 3분의 1 이상이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대상 이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구 전과자 및 폭력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진행됐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으나, 파출소, 경찰서들 사이의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 더보기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과 함께 삼허로 불리며 삼청교육 등을 주도하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과 함께 삼허로 불리며 삼청교육 등을 주도하다. 허삼수(許三守, 1936년 9월 18일 ~ )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최규하 정부와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의 한 사람으로 허화평, 허문도와 함께 삼허(3許)로 불렸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군 생활 부산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육군 소위로 임관, 1965년 육군 방첩부대로 전속되어 그 후 15년간 방첩, 정보,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하였고,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군생활 중 그는 허화평, 안현태 등 육사 17기 동기들 중 일부와 함께 하나회에 가담하였으며 하나회 내 육사 17기 멤버들의 리더였다. 육군 대령으로 재직 중 ..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