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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한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다. 한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다. 한확(韓確, 1400년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부인 정선군부의 친정아버지이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더보기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다.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다. 최만리(崔萬理, ? ~ 1445년 10월 23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이다. 본관은 해주,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해주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2대 후손이고, 최자(崔滋)의 6대손이며 최하(崔荷)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용수(池龍壽)이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19년(세종 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과 집현전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427년에는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집현전 부제학,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나, 세종대왕이 한글.. 더보기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12월 28일 ~ 1478년 11월 26일)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 더보기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세종 때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악장·서사시이다. 정인지와 안지, 권제 등이 짓고,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 정인지가 서문을 쓰고 최항이 발문(跋文)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 지어 1447년(세종 29년)에 간행하였다.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모두 125장으로 조선 개국의 위대함과 시련을 노래했고, 그것이 하늘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내용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 등 조선의 선대인 6대에 걸쳐 그 사적을 노래했다. 제1장, 제125장 등 10여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장이 2절로.. 더보기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集賢殿)은 정이품아문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자, 왕실 연구기관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더보기
남이 장군,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다. 남이 장군,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다. 남이(南怡, 1441년 ~ 1468년 10월 27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장군, 정치인, 시인, 척신이다.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고, 할머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 이며, 부인은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본관은 의령이다. 무예에 능하였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20대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해임당한 것에 불만을 품던 중 그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문제삼은 유자광(柳子光)과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의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순조 때인 1818년(순조 18년)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초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부사를 지낸 남재(南在)의 현손으.. 더보기
이시애의 난, 단종 폐위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하다. 이시애의 난, 단종 폐위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거사를 모의하다.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은 1467년(세조 13년) 5월부터 8월까지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 등이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이시애는 길주 출신의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함길도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왕조의 주요 연고지 중의 하나였으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외지에서 부임한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함경도내 유향소 세력을 규합, 1467년 5월 이시애 등은 함경도.. 더보기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과학을 발전시키고 유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다.(2)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과학을 발전시키고 유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다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 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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