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조소앙의 광복군 창설과 외교활동, 삼균주의를 창시하다.

반응형

 

조소앙의 광복군 창설과 외교활동, 삼균주의를 창시하다.

 

임시정부 조직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4월 10일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성부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정도령에 손병희, 부도령 및 내각총리경에 이승만을 임명해서 내각을 구성할 때 조소앙은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혁명당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임시헌장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초대 임시 의정원 의원(지역구 경기도 대표)으로 선출됐다.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회되고 초대 국무총리이승만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될때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본 국에서 군자금 모집, 송금, 임시정부 선전, 독립사상 고취 등의 임정 대외 홍보업무를 담당하였다.

 

외교 활동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국체(國體)와 정체(政體)의 이론정립 및 대외홍보 등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5월에는 파리강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유럽에 갔으나 이미 회의가 종료되었으므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고 1919년 8월에는 스위스네덜란드에서 연이어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사회주의국제연맹 총회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석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9월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노동당 인사와도 교류하였다. 1920년 2월에는 파리에서 앙리 베르그송을 만났으며 4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맥켄지를 만나고 노동당의 맥도날드 등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5월에는 덴마크,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방문하고 소련으로가서 소련 공산당을 방문한 뒤, 소련 내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1921년 3월 모스크바 공산당대회를 참관하고 5월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를 거쳐 북경에 돌아와 만주리선언을 발표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1922년 1월 국민당 간부이자 무정부주의자 였던 장계의 초청으로 북경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그는 국제사회당 대회 참석, 사회민주주의 국가 서유럽의 학자와 정치가들과 교류, 사회주의 국가 소련 방문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한살임당 일명 대동당을 조직하고 한살임요령을 발표하였다. 또한 상해에서 한살임 당원인 김상옥을 만나 사이토 조선총독의 암살에 대해서 결의를 고취하여,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도록 하였다. 1922년 국제연맹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좌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1922년 7월 김구,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李始榮), 여운형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고수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론(안창호,여운형,김동삼 등), 창조와 해산을 주장하는 창조론(김규식, 신채호 등),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는 임정수호론이 제기될 때 그는 김구·이동녕 등과 임정 수호론을 주장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1921년 도미 이후 임시정부로 돌아오지 않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완구·최창식 등과 함께 이승만 탄핵을 반대하였다.

이승만의 도미 이후 그는 이승만과 편지 서신과 통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동시에 상하이 현황을 이승만에게 알리는 연락원이기도 했다. 1925년 3월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창호가 미국에서 추종자들을 시켜 한인으로부터 인두세(人頭稅)를 거둬 임정으로 보낼 것'이라며 그의 행동을 은근히 비난했다.

 

이승만에게 쿠데타 제의

임시정부내 친이승만 세력이었던 그는 1925년 3월 이승만이 탄핵되어 면직되자 그는 1925년 5월 16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무력 쿠데타'를 권유하였다. 그는 또 다른 방안으로 하와이에서 임시 의정원을 소집해 새 정부를 조직하자는 급진적인 '권력 만회 구상'을 펼쳤다.

 

...(이상 중략)...전날 말씀드린 대로 선포문을 발간하십시오. 전후 내막을 폭로해 내외 동지의 굴기(崛起)를 고취하며 일면으로 무사(武士) 기십 인을 지휘하여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인장(印章)을 압수하고 즉각 내각을 발표하여 정령을 반포하면 현 정부는 와해될 것이오니...(이하 중략)...
- 1925년 5월 16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후에도 그는 이승만에게 수시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현황, 상하이와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의 동태를 꾸준히 서신으로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보고하였다. 조소앙은 광복 직전까지 이승만에게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한다.

 

국무위원 활동 및 무장단체 참여

1926년 이후 임시정부외무총장, 학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국무위원으로 선출되고 이듬해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김구와 함께 특무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요인 암살에 노력하였다. 1927년 11월 이동녕, 김구, 안창호, 이시영, 홍진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때,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을 기조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시하고 이를 당헌과 당강으로 기초하여 통과시켰다.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그는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발표하였다.

1930년 7월 국무위원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위원 외무장에 임명되었다. 1932년 봄 윤봉길의 홍구공원일왕암살미수사건으로 중국인 이정의 도움으로 항주로 피신하여 1년간 머물렀다. 11월 임정 임시국무회의에 참석, 임정 외무부장의 명의로 이승만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의 전권대사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발송하였다. 1933년 1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과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됐다가, 3월 6일 해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0년대에도 김규식, 김원봉, 김두봉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면서 임시정부 해체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정을 유지해야 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민족유일당 운동

1933년부터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운동에 가담하였다. 1934년 삼균주의를 국시(國是)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을 발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채택하도록 하였다.

1934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고,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임시정부가 항주로 이전하자 국무위원 외무장에 재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 겸 내무부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3월 3·1만세 운동 제17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한국독립당의 명의로 된 기념선언을 발표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이 결성되자 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광복진선에 참여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외무부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갈등을 놓고 쑨원의 아들 쑨커가 "너희 사람은 왜 뭉치지 못하느냐"며 조롱하자 조소앙은 "한국 사람이 위대한 것이다. 한 사람 혼자서 천하를 영도해나가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니 중국 사람이 모방할 만 한 일이 아니냐"며 반박하였다.

 

임시정부 재입각

1940년 5월에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재건파 등 3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을 재창립할 때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8월 임시정부가 쓰촨성 충칭으로 옮긴 뒤 9월초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광복군 창설과 외교 활동

 

9월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하였고, 9월 17일 조소앙은 자신이 친히 작성한 한국 광복군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41년 12월 9일'대일본선전포고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1941년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초안을 작성, 발표하였다.

1942년 2월 12일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 대사 고스(Clarence E. Gauss)를 방문하였다. 방문에서 조소앙은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쉽게 승인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패배한 뒤 한국을 다시 중국의 종주권 안으로 넣으려는 속셈으로 파악하였다. 1942년 11월 24일 조소앙은 고스와의 대화에서 중국은 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강요한 준승안에 분개하여 정부를 워싱턴으로 옮길 것을 검토한다고 알려주었다. 동시에 인도에 사람을 파견하였고 이승만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1944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으로 재선되었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명의로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과 귀국

1945년 11월 23일 임정 환국요인 1진으로 귀국하였고, 1945년 말 조소앙은 임정 대변인으로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 있었다. 1945년 12월 29일 밤 10시부터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운동 준비를 위한 경교장 회의에 참석하였다. 12월 30일 송진우가 암살되자 12월 31일 조소앙은 테러는 혼란의 근원일 뿐이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1일 오전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에 의해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군정청으로 소환되어 경고를 받았다. 이후 조소앙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 연관글

[역사보기] - 조소앙,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해 2.8독립선언을 기획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