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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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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오다.

 

윈스턴 레오너드 스펜서처칠 경(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KG, OM, CH,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총리(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1951년 10월 26일 ~ 1955년 4월 7일)를 지낸 정치가이다.

 

가계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중 한 명이다. 그의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들을 배출하여,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였다. 처칠에게는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8대 선조이기도 하다. 즉,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처칠은 같은 뿌리를 가진 친척이다.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자넷 처칠 여사는 미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적들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뒤 회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사망한다. 당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들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사관학교 시절과 보어 전쟁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로우 스쿨에서의 학과공부에 흥미가 없었으나,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역사에 소질이 있었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수단인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현재 터키 공화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진짜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있다.

 

종전 과정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

 

은퇴 후

1946년 3월 5일, 미국 남부 미주리 주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영어 사용 국민들 간의 형제애적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고 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53년 처칠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55년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정식으로 은퇴하였다.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미국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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