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보기

임진왜란의 서막, 정발과 부산진성

아쫑 2025. 4. 27. 18:42

 

 

부산진성 전투: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피비린내 나는 격돌

1592년,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 첫 번째 전투가 바로 부산진성 전투다. 이 전투는 조선군이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성이 함락되고 말았던 비극의 서막이었다.

전운이 감도는 바다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을 명령하고, 명나라까지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소 요시토시와 마쓰라 시게노부를 포함한 일본군 병력 1만 8,700명이 700척의 병선을 타고 부산 앞바다, 영도에 상륙한다.

이를 목격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은 부산진성으로 급히 들어가 수성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병력, 식량, 무기 모두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은 일본군 침공 소식을 듣자 관내 함선을 모두 불태우고 달아났고, 경상우수사 원균 또한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기고 도망쳤다. 조선 수군은 싸워보기도 전에 붕괴된 상태였다.

일본군, 부산진성을 포위하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부산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치열한 1차 전투가 벌어졌다.

정발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맞섰다. 그러나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2차 공격에서 조선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부산진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장렬한 최후

정발은 성을 지키다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부산진성 안의 군인들 역시 대부분 전사하거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쓰러진다. 정발의 첩 애향은 일본군에 잡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일부 병사들은 시체더미 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 전투가 끝난 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민간인과 항복한 포로들에 대한 무차별 살육을 중단한다. 이들은 4월 17일에 풀려나기도 한다.

부산진성의 함락, 그리고 동래성으로

부산진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즉시 동래성으로 진군한다. 일부는 남서쪽 다대포진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방어망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이로써 임진왜란의 참혹한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