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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의 장군, 정발

아쫑 2025. 4. 27. 20:55

 

임진왜란의 첫 번째 충신, 흑의장군 정발

 

1592년, 조선을 뒤흔든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그 전란의 서막에서 누구보다 먼저 일본군의 침공을 맞이하고, 끝까지 성을 지키다 쓰러진 장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흑의장군 정발이다.

태어난 배경과 집안

정발(鄭撥, 1553~1592)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광동리 너븐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말 개국공신 정희계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정명선은 간성군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관찰사 남궁숙의 딸 남궁씨였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즐겼고, 소학과 경전을 통달하여 선비다운 풍모를 갖추었다.
또한 손오병법에 능통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무과 급제와 관직 생활

1579년(선조 12년), 무과에 급제한 정발은 선전관을 거쳐 해남현감과 거제현령을 지냈다.
이어 북변 종성에 여진족이 침략하자 북정원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출정하였으며, 직접 화살로 여진족을 사살하는 무용을 보였다.

비변사 낭관, 위원군수, 훈련원첨정, 사복시첨정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와 내정 양쪽에서 경력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 정3품 절충장군에 올라 경상좌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발발과 부산진성 전투

1592년 4월 13일(음력), 정발은 부산 영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던 중 일본군이 몰려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처음에는 조공 사절인 줄 알았으나, 일본군이 조총을 들고 상륙하는 것을 보고 침략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수비를 준비하고, 긴급히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당시 부산진성에는 병사 800명과 백성 2200명 정도밖에 없었으며, 조선 수군 수뇌부는 이미 달아난 상황이었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정발은 검은 옷을 입고 군을 지휘하여 ‘흑의장군’으로 불렸으며,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기에는 병력과 화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성벽은 뚫렸고, 2차 백병전 중 정발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남아가 세상에 나서 전쟁터에서 죽을 뿐이지, 어찌 구차히 목숨을 구하겠는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였다.

죽음 이후의 평가

정발의 시신은 전투 중 실종되어 찾지 못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투항했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훗날 살아남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그의 전사 사실이 확정되었다.
사후, 투구와 갑옷을 모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34에 의관장(衣冠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선조는 처음에는 정발의 죽음을 의심하였으나, 후일 그의 충절이 밝혀지자 병조판서에 증직하였다.
뒤이어 숙종 대에 이르러 증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으며,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동래의 안락서원에 배향되었고, 부산진성 남문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정공단이 세워졌다.

흑의장군, 오늘날의 기억

정발의 후손들은 경기도 연천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의 묘소는 1979년 경기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산 동구 초량동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비록 부산진성은 함락되었지만, 정발은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조선 군민에게 정신적 저항의 불꽃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임진왜란의 첫 번째 충신으로,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