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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동아시아 역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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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동아시아 역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의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개요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0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수성에 들어간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을 무시하고 한양과 인조를 목표로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7일에는 강원도 근왕병이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탄약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에는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몰락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명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1623년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탓에 교역로가 끊겨 물자 부족에 심히 허덕여 이를 조선과 하는 통교를 이용하여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조선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과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정벌해달라고 종용하였다.

홍타이지는 더욱 결전할 뜻을 굳히어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과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을 데리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1627년(인조 5년)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3만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북변의 군사 체계가 붕괴된 상태였던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조선 조정 내에서도 화의론이 대세를 이루고 후금도 오랜 기간에 걸치는 출병이 곤란했으므로 전쟁은 지속되지 않았고 청군은 약 두 달 만에 강화조약을 하고 철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을 하였다.


정묘호란 후 양국관계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이 대두했고 후금과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음력 2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그해 음력 4월 황제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이라 고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의 도전하는 태도에 조선을 원정하려고 군을 조직할 준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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