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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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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丙寅洋擾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통상거부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배경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조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이 틈을 타서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

(1861년 입국) 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전교에 힘썼으므로 1861년

(철종 12년)에는 천주교인의 수가 1만8천 명,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3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

한편 1864년(고종 1년) 러시아인들이 함경도의 경흥부에 방문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는 안심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제안했던 삼국 동맹도 무산된다. 또한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며 선교사들을 지탄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1866년(고종 3년)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게되었다.

 

남종삼·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1866년 5월 8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는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델이 도착했을 때 프랑스 극동함대

(極東艦隊)사령관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

 

경과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고 받은 북경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Henri de Bellonet)는 청나라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 공친왕 혁흔

(恭親王 奕訢)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했다. 

 

 

                                                                                           로즈제독

 

 

"우리는 소왕국 조선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폭행사건을 전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프랑스 황제폐하는 이 같은 잔인한 폭행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국왕이 우리

프랑스인을 체포한 바로 그날 그의 치세가 끝나게 될 것이다. 수일 내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할 것이다. 이제 우리 황제폐하만이 조선의 장래와 공석이

될 조선 왕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측은 “조선은 비록 청의 속국이긴 하지만 예로부터 내정과 외교는

자치적으로 행해 왔다.”라는 식으로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거짓 주장과 함께

청이 개입할 여지는 실질적으로 없다는 식의 이중적 표현을 담은 답신을 보내,

사건이 청나라와는 무관함과 향후 이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청나라 정부는

간섭할 수 없음을 프랑스 공사관 측에 통고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침략 의사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다



1866년 음력 9월 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다. .10월 19일(음력 9월 11일)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회답 격문이 왔다. 그에 따르면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1866년 10월 26일(음력 9월 18일) 지금의 마곡철교 하단부를 통과하여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11월 2일(음력 9월 25일)에 청나라로 물러났다.

 

조선 정부는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그 해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

(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1월 22일

(음력 10월 16일)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장수들을

급히 양회진·통진(通津)·광성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1월 25일(음력 10월 19일)에는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은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의 천주교 탄압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했다.

 

12월 2일(음력 10월 26일)에는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 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12월 13일(음력 11월 7일)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160여 명의 프랑스 해병이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했다.

12월 17일(음력 11월 11일) 프랑스 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금은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청나라로 철군했다.


다만 프랑스군 기록에선 병인양요 전 기간중 프랑스군의 피해는 3명의 전사자와

35명의 부상자가 전부이다.

 

영향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조선-청나라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한국과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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